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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외맛식혜 Jun 20. 2023

사회생활 초짜 둘이 살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애인과 둘이 같이 살게 되면 평소에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궁금하곤 했었다. 


코로나로 인해 서로 떨어진 2년. 그동안 우리는 각자가 어떤 일상을 보냈는지, 무엇을 먹었고 누구를 만났고, 요즘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주로 얘기했다. 나와 달리 단조로운 일상을 좋아하는 그는 코로나 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를 착실하게 이행하며 집 밖에 나가거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고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일상을 빵을 굽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일을 하며 보냈다. 그와 달리 항상 호기심이 많으며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나는 뜨개질로 내가 만든 수세미를 자랑하고, 요가를 시작해 나에게 얼마나 잘 맞는 운동인지 떠들었으며, 평일에 여유 있게 카페에 가서 새로 출간된 에세이를 읽는 삶을 착실하게 들려주었다. 


마침내 같이 살게 되었을 때,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허겁지겁해 나가는 것도 잠시였고 이내 우리의 일상을 비슷해졌다. 장을 봐서 같이 요리하고, 식사를 함께하고, 같은 드라마를 정주행 했다. 밖에 나가는 일도 적어졌는데, 애인은 맨체스터에 할 게 없다는 이유를 항상 시전 한다. 그렇게 서로의 일상을 나누던 대화는 마침내 단 하나의 주제로 대체되는 것 같았다. 바로 일. 


나와 애인은 2살 차이로 (그가 연상이다) 20대 후반, 이제 곧 30대를 목전에 두고 있지만 일과 커리어에 대한 경험치는 글쎄… 아직 초보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우연히 지금 일을 시작하게 되어 3년 이상 리테일에 몸 담그고 있다. 애인은 대학 졸업 이후 한국에 와서 2년 간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일을 했고, 그 뒤 코로나 기간 영국으로 돌아와 1년은 쉬고 1년은 동네 카페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맨체스터로 이주하였을 때, 처음으로 사무직 회사원이 되었다.


우리가 일을 시작하게 된 이후 가끔씩 상기된 얼굴로 우리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털어놓았다. 


나의 패턴은 주로 이런 것이었다. “동료들의 맨체스터 억양을 잘 못 알아듣겠다. 친해지고 싶은 데 뭔가 벽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익숙해지는데 꼬박 6개월이 걸렸다) “이상한 고객이 와서 나에게 인종차별적인 얘기를 했는데 똑바로 뭐라 하지 못해 속상하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빨리 승진하고 싶은데 기회가 너무 안 열린다.” “여기 사람들 너무 일을 안 해서 내가 남들의 몇 배를 하게 되고 심지어는 억울하다.” (아마 영국에서 일해 본 적이 있는 한국 사람들이라면 격하게 공감할 것이다. 하염없이 시간을 쓰며 일은 전혀 진척이 안된다.) 


반면 나의 애인은 영국 공기업에서 4명 남짓한 소규모 팀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주로 이런 것에 화를 낸다. “매니저가 실무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다. 뭔가 부탁해도 결국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 “나만 일하고 다른 사람들은 뭐 하는지 모르겠다.” “미팅에서 서로 수다 떠는 게 너무 가식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진다.” (영국 사람들은 일이던 일상이던 이런저런 수다 떠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나도 처음에는 ‘뭐 저런 것까지 얘기해?’ 싶었다.) 


이렇게 한쪽이 업무에서 쌓인 분노를 털어놓으면 보통 다른 쪽은 열심히 경청하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그리고 ‘매니저에게 분명하게 상황을 얘기해’, ‘너만 일하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좀 시켜’ 등등 나라면 그 상황에서 할 것 같은 대처 방안을 내놓는다. 그렇지만 무엇하리. 사회생활 초짜가 알려주는 대처 방법이란 현실 세계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법. 어느새 말하는 쪽도 듣는 쪽도 지쳐서 “그만두고 싶다”라는 말이 나오면 그제야 대화가 마무리된다. 


우리가 맨체스터 산지도 언 1년, 영국에서 일을 해온 기간도 얼추 비슷하다. 함께 ‘생활’ 하기 위해서 새로운 도시에 정착하고 적응했지만 결국 우리의 생활을 채우는 건 결국 ‘일’이라니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이고 당장 우리의 월세와 식비를 해결하게 해주는 것도 일이다. 요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우리 같은 사회생활 초짜 둘이 좀 더 효율적이게 그리고 덜 힘들게 일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그래도 지난 1년을 뒤돌아 보면 조금의 발전은 있었다. 이따금 고객들에게 '억양이 들린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영국 영어, 특히 맨체스터 억양에 익숙해졌다. 사람들의 말이 잘 들리기 시작하니까 회사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수월해졌다. 아직 내가 대화를 이끌거나 농담을 던질 정도는 아니지만,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가장 흔한 대화 주제에 가뿐하게 나의 일상을 요약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한 고객을 만나도 참기보단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고, 중국인이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한국인이라고 말하며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게 되었다. 또한 '일'이 최우선이 아닌 이들의 사고방식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국에서처럼 악착같이 일하지 않아도, 나를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일만 우선순위에 두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조금 쉬어 가라는 말도 듣는다. 나를 내려놓는 게 아직도 어렵지만, 적어도 여기서 만큼은 처음으로 '일'보다는 '나'를 우선으로 하려고 한다. 


오늘 집에 오는 길에 우편함을 열어 살펴보니 회사에서 가입한 퇴직연금에 대한 안내장이 왔다. 거기에는 2061년 8월이 되어야 첫 연금을 받아볼 수 있다고 큼지막하게 적혀있다. 한해 한해 일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한평생을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데 일 평생이 걸릴 수도. 그렇지만 나는 이제 안다. 단숨에 되는 것이 없는 영국에서는 무엇을 하던 '시간'이 걸린다. 그렇지만 쌓여간 시간은 공고하게 나를 받치고 나는 단단해져 간다. 내년의 우리에겐 견뎌온 시간에 더불어 사회생활에 대한 경험치가 한 스푼 더 쌓였길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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