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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외맛식혜 May 24. 2023

우리는 무슨 관계라고 해야 해?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그게 왜 필요해?" 


영문 통장거래내역서가 필요한데 핸드폰으로 발급이 안되자 엄마에게 부탁했다. '컴퓨터로 발급이 되는데 공인인증서가 어쩌고 저쩌고' 길게 카톡을 보냈더니 돌아온 첫 대답이었다. 그러게, 집 하나 구하는데 도대체 왜 필요한 걸까?


한국에서 세입자에게 통장거래내역서, 지난 3개월 간 급여내역서, 공과금 지불 영수증 등등을 요구한다면 아마 뉴스에 보도되었을 것이다. 큰 금액의 보증금과 월세를 감당할 여건만 된다면 누구든 월세 계약을 할 수 있는 한국과 다르게, 영국에는 이 모든 것이, 아니 더 많은 서류와 시간이 요구된다.


집주인으로부터 간택받은 이후, 우리는 본격적인 집 계약 과정을 시작했다. 우선 당장 170 파운드(한화 약 27만 원)의 '환불 안 되는' 계약금을 지불했고 (이후 계약이 성사되면 보증금의 일부로 활용된다), 며칠 뒤 온라인을 통해 필수 서류를 제출할 수 있도록 안내받았다. 2010년쯤에 멈춰있는 조금 구린 UI의 홈페이지에는 나와 애인의 온갖 개인 정보를 기입하도록 되어있었다. 


메일을 받은 시점에 나는, 런던에 휴가를 온 지 첫날이었고 나름 알찬 시간을 보내고자 막 미술관에 도착한 상황이었다. 마감이 임박한 것도 아니었는데 자꾸만 신경이 쓰였고, 성격 급한 한국인으로서 그 자리에서 접속해 하나둘씩 칸을 채워나갔다. 그런데 어라, '나는 외국인이라 여권 번호가 필요하네?' '이제 영국 온 지 한 달 되었는데 급여가 찍힌 3개월 치 입출금내역을 내라고?' 이 뿐만 아니라 영문 급여 내역서, 회사 정보, 회사가 발급한 재직증명서, 그리고 담당 부서와 담당자의 이름 및 번호와 연락처가 필요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금 거주지의 집주인으로부터 거주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했고, 이후 업체 측에서 직접 확인을 할 수 있게 연락처 및 이메일 주소를 써야 했다. 벌써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와 애인인 런던이고 뭐고 아침부터 카페로 직진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각자 부모님에게 급하게 연락해 필요한 서류들을 받아오고 그와 동시에 플랫 주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간단한 거주 증명서를 받았다. 나는 직속 상사를 기입해야 하는지 인사부서를 기입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회사에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이제 막 이직한 애인은 아직 첫 출근도 하지 않은 채 회사에 메일을 보내야 했다. 이후 며칠간은 모호한 부분들을 메모했다가 전화로 문의하고 (대기가 길어 스피커폰으로 해놓고 설거지해도 될 정도이다) 각자 퇴근하는 데로 방에 모여 서류들을 준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침내 서류 제출이 마무리된 이후, 기다림의 시간이 찾아왔다. 부동산 업체가 직접 서류를 확인하지 않고 신원조회 전문 회사가 중간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거주 증명은 현재 집주인의 빠른 응답 덕분인지 금방 처리가 되었지만 (제임스 고마워), 각자의 재직 증명은 며칠이고 처리가 될 기미가 없었다. 그 과정에서 애인은 적절한 책임자를 수소문 끝에 찾아냈고 새로운 이메일과 연락처를 업데이트하여 결국 해결하였다. 문제는 나의 회사. 신원조회 측에서는 회사가 회신이 없다고, 우리 회사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서로의 책임으로 돌렸고 나는 중간에 낀 채 서로의 상황을 전달하며 진땀을 뺐다. 밖에 나오면 내 맘대로 되는 게 없다더니.  


“설사 계속 연락이 안 된다 해도 재직증명서랑 급여명세서가 있으니까 그걸로 승인 날 수 있어요. 괜찮을 거예요” 전화 건너편 신원조회 회사 측의 대답이었다. '아니, 그럼 애초에 회사에 직접 연락해서 확인하는 과정이 왜 있는 거지?' 속은 타들어갔지만 따져서 무엇하랴. 혹시나 신원조회에서 엎어진다면 지불했던 계약금은 물론이고, 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할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 집의 입주일에 맞춰 현재 플랫 셰어의 기간을 2주 더 연장했으며, 이 뒤로는 다른 세입자가 들어올 것이라 당장 갈 곳이 없을 수도 있었다. 걱정이 많은 우리 둘은 온갖 끔찍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알겠다고, 하루빨리 이 모든 게 해결되길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입주 2주 전, 기적같이 신원조회가 통과되었다. 


집 계약이 확정되자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다행히 이사 날짜를 주말로 잡을 수 있었고 3개월 간 알게 모르게 늘어난 짐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정리해 나갔다. 홍콩인 집주인도, 회사 사람들도 마침내 1년 간 정착해 살 우리만의 공간을 찾은 것에 축하해 주었다. 더 이상 꽉 찬 주방이 빌 때까지 기다리거나, 오지도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출퇴근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예. 플랫에서 방을 빼는 날과 새 집에 입주하는 날에 3일 정도의 갭이 존재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의 고생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시내에 호텔을 잡아 잠시 지내기로 했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 예상치 못한 호캉스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체크아웃과 동시에 우리는 부동산 업체 오피스에 들러 마침내 새 집의 열쇠를 받을 수 있었다.    


“우리 무슨 관계라고 해야 해?” 집 계약서에는 나와 애인이 공동 세입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관계를 명시하는 칸이 있었다. 친구, 가족, 파트너, 배우자? 영국의 다양한 사회를 반영하듯, 가정의 형태 또한 참으로 다양한 명칭들이 존재했다. “Co-habiting으로 하자. 우리가 아직 법적으로 파트너 관계가 아니니까." 함께 산다는 뜻의 Co-habiting, 즉 동거. 나는 왜인지 모르게 그 단어가 참 맘에 들었다. 5년 간 서로를 믿고 사랑해 온 애인 관계인 것이 맞지만, 서로에게 의존하기보다 각자의 사생활과 의견을 존중하고 함께 나아가는 우리와 참 닳아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좋아.” 번듯한 집 계약서와 함께 우리의 동거 생활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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