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나는 맨체스터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스튜디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따지면 원룸에 살고 있다. 각자 방이 없어 각자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어렵고 (아무리 서로를 사랑해도 24시간 내내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법), 둘이 자기엔 어깨를 부딪혀야 할 정도로 작은 더블 침대에, 이 놈의 베이지 색 카펫은 왜 이리 관리가 어려운지. 요리하다 뭐라도 튀면 모든 일을 멈추고 당장 닦아야 하는 건 물론, 온갖 머리카락과 먼지가 들러붙어 아무리 청소기로 밀어도 깔끔하게 제거할 수 없다. 이렇게 불평하면서도 시내 한가운데 마음 놓고 들어 누울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특히 이 집을 구하기 위해 겪었던 시행착오를 생각했을 때.
플랫 셰어를 하는 3개월 동안, 나와 애인에게는 집 구하기 특명이 떨어졌다. 영국도 한국과 비슷하게 온라인을 통해 집을 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스페어룸(SpareRoom)은 보통 단기 임대나 플랫 셰어 혹은 룸 셰어가 주로 올라오는 사이트. 영국의 집세는 워낙 살인적이라 (그걸 피해 맨체스터에 왔지만 여전히 한국에 비해 비싼 것은 사실이다.) 이런 형태의 주거가 일반적이다. 장기 임대가 꺼려지거나 혹여나 플랫메이트와 친구가 되는 로망이 있다면 (행운을 빈다) 플랫 셰어를 구해 들어가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 기간이 촉박하더라도 비교적 빠르게 구할 수 있다. 내가 살았던 셰어 하우스 역시 근무를 시작하기 불과 며칠 전 스페어룸을 통해 극적으로 구할 수 있었다.
공용 주방, 공용 욕실이 싫고 나만의 단독 공간을 찾고 싶다고? 그렇다면 롸잇무브(RightMove), 주플라(Zoopla)를 찾아보자. 이곳에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월세 임대가 활발하게 이뤄지며, 특정 호스트가 아닌 부동산 업체들이 매물을 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영국에는 보통 스튜디오(Studio), 원 배드룸(One Bedroom), 투 배드 룸(Two Bedroom)의 집 구조가 일반적이다. 이 보다 큰 집의 경우 보통 2층짜리 단독주택으로 분리되며 임대가 아닌 매매가 일반적인 듯하다. 이런 단독 주택을 집주인이 구매 후 플랫 셰어로 재임대(Sub-let)하는 경우도 흔하다. 내가 살았던 플랫 역시 집주인이 구매한 후 3명에게 플랫 셰어로 재임대를 주는 구조였다.
나와 애인이 생각했던 집의 조건은 그리 까다롭지 않았다. 우선 단독 사용 공간일 것(당연하게 들리지만 그만큼 쉽지 않다), 시내에 위치한 나의 직장에 도보로 출퇴근이 가능할 것(맨체스터의 대중교통은 극악이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얘기하겠다.), 그리고 둘이 살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을 것. 그래서 이왕이면 원 배드룸을 고려하고 있었다. 대중교통 비용을 월세에 보태자는 생각으로 850파운드(한화 130만 원)까지 지불한 생각이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집이 없었다.
"우리가 영국에 이주할 것을 사람들이 미리 알고 단체로 집을 다 사갔나?" 싶을 정도로 집이 없었다. 홈페이지에 이러한 조건을 넣고 검색하면 10개 미만의 매물이 보였고 관심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도 감감무소식. 그리고 몇 시간 뒤 다시 들어가 보면 이미 매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우리는 점차 필터를 풀고 맨체스터 시내, 아니 30분 이내 대중교통이면 어디든지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약간 비싸더라도, 원배드룸이 아니더라도 괜찮아 보이는 매물이면 일단 관심을 표출했지만 그 누구도 우리에게 답신을 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맨체스터에서 1년짜리 집 계약을 구하기엔 하늘의 별따기. 우리 두 명의 초짜들은 어느새 서바이벌 게임에 참가하고 만 것이었다.
해외에서 플랫 셰어만 했던 나에겐, 영국에서 기숙사만 살았던 애인에게는 아무런 경험치가 없었다. 이후 폭풍 검색을 통해 부동산 업체 사이트에는 집 구하기 사이트와는 다른 매물들이 존재하며 보다 업데이트가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메일 연락은 죽었다 깨도 안 통해 무조건 전화를 해야 한다는 진리에 도달하였다. 콜 포비아(전화 통화를 두려워하는 심리 상태)가 있는 애인은 매물을 찾을 때마다 나에게 링크를 보냈고 나는 근무하다가도 짬이 날 때마다 전화해 매물이 아직 있는지, 집을 보러 갈 수 있는지 물었다. 전화 연락에도 나름의 노하우가 필요했다. 우선 한 번 전화해서는 안 받는다. 보이스 메모를 남겨도 연락이 안 온다. 그렇기에 하루 날을 잡아 아침, 오후, 저녁 등 다양한 시간대를 공략해 집요하게 전화해야 한다. 드디어 전화를 받았다고? 아직 방심하기엔 이르다. 자신이 원하는 매물이 무엇인지 집 이름을 밝히고 언제 뷰잉이 가능한지 미리 확인해야 한다. 여기서 머뭇거리거나 즉시 대답을 못하는 경우 상대편은 금방 질려 말을 둘러대며 전화를 끊을 것이다. 망할 수요와 공급.
이런 과정을 한 달간 진행한 끝에 정말 놀랍게도 우리는 몇 번의 “Yes”를 들을 수 있었다. 영국에서 부동산 업체와 연락이 닿으면 뷰잉(Viewing)이라는 필수 단계를 거친다. 세입자, 부동산 업체, 그리고 지원자가 날짜를 맞춰 집을 방문하고 직접 살펴보는 날이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잠시 중단된 적도 있다지만, 업체 측에서는 미래의 세입자 직접 볼 수 있으며, 우리 역시 집 상태를 확인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기회이기에 서로에게 매우 중요하다. 보통 이 날은 하루 종일 지원자의 방문이 이어지는데 집 하나를 놓고 20팀 이상이 경쟁하기도 한다. 나와 애인이 처음 갔던 뷰잉 역시 너무 치열해 경쟁에서 밀리고 말았으며, 두 번째 뷰잉은 날짜를 조금 미뤘더니 그 사이 집이 나가 버리고 말았다. 희망이 점차 꺼져가는 사이, 우리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더 찾아왔다.
맨체스터 시내에서 도보 10분 정도 떨어진 아파트 단지였으며 스튜디오와 원 배드룸 매물이 하나씩 나있는 상태였다. 매물이 뜨자마자 전화한 애인은 (집 구하기 여정은 그의 콜 포비아도 물리쳐버렸다) 5번 이상 시도한 끝에 마침내 연락이 닿았고 가장 빠른 날짜에 뷰잉을 잡았다. 스케줄 근무를 하는 나는 뷰잉에 참가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근무를 해야 했고, 다행히 애인이 혼자서 참여할 수 있었다. 뷰잉에 다녀온 그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탓에 놀랐다고 했다. 부동산 업체 직원 분은 소규모 그룹을 이끌며 단지를 소개하고 두 집을 보여주었으며, 모인 사람들끼리의 미묘한 신경전도 관전 포인트였다고. 뷰잉 때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여준 이탈리아인은 결국 떨어졌지만.
그날 저녁 KFC에서 비건 치킨 버거를 먹으며 우리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뷰잉 직후 각자의 개인정보, 연봉과 선호 매물 순위를 적어 오후 6시 전까지 문자로 보내야 했다. 원 배드룸이 우리의 1순위였지만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과 인기로 우리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현재 플랫에서 집을 빼는 날짜까지 채 2주도 남지 않았기에 정말 절박했다. 그리고 마지막 뷰잉이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결국 우리는 전략적인 선택으로 스튜디오 1순위, 원 배드룸 2순위로 적어 보냈다. 고민만 2시간이 넘어 거의 막바지에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나는 지친 마음과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간 뒤 부모님에게 분노가 섞인 후기를 잔뜩 적어 메시지를 보낸 후 잠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1주일 뒤 토요일 오후, 나는 한 통의 이메일을 받게 된다. “000 스튜디오에 지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집주인의 검토 끝에 대상자로 선정되었습니다. 입주 희망하시는 경우 해당 계약금을 1시간 내로 입금해 주시고 서류를 일주일 내에 제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