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외맛식혜 Apr 26. 2023

자연스럽게, 분담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당신은 어느 쪽에 자신 있는가. 얼마 전 즐겨 듣는 팟캐스트를 통해 물리적 청소와 화학적 청소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야 우리의 서로 다른 청소 스타일에 맞는 이름을 찾았구나 싶었다.


영국에서 일을 시작하기 불과 며칠을 앞두고, 가장 대중적인 집 구하기 플랫폼 스페어룸(Spare Room)을 통해 세 달간 임시로 살 거쳐를 마련할 수 있었다. 맨체스터 중심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떨어진 그곳은 방 새 개짜리 단독주택을 각각 나눠 쓰는 플랫 셰어(Flat Share)의 형태였다. 마침내 퀸 사이즈 침대와 옷장, 책상 하나의 공간을 얻게 된 우리는 안도할 수 있었다. 비록 꿈에 그리던 우리만의 공간은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치우고 나만의 물건으로 빈자리를 채우면서 조금씩 이 낯선 생활에 마음을 내주었다.


언젠가 신혼부부들이 가사 노동을 어떻게 분담할지 하나하나 정해나가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성 커플인 만큼 이성 커플이 흔히 맞닥뜨릴 만한 성별에 따른 갈등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한 쪽이 희생하거나 파트너의 노동력을 당연시 여기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집을 구하게 되면 가사 분담을 하나하나 약속을 통해 정해 나갈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전은 언제나 예상과는 빗나가기 마련.


이미 정리도 되어있고 이전 세입자가 나간 뒤 청소도 했을 그 방이, 나는 뭔가 찜찜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캐리어 세 개를 방으로 힘겹게 옮기고 잠시 한숨을 돌릴 법도 한데. 짐도 풀기 전 이미 벌러덩 누운 애인을 나는 뒤로하고 청소기를 찾아 바닥을 사정없이 밀었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먼지들과 머리카락. 조금씩 깨끗해지는 방을 보며 나는 강렬한 희열을 경험했다. 그다음은 걸레질이었다. 물티슈로 한계를 느낀 나는 급기야 이제 처음 들어간 주방 선반에서 새 행주를 찾아내 본격적으로 책상, 침대 프레임, 옷장 등을 닦기 시작했고 그 모든 작업이 다 끝나서야 비로소 내 물건을 놓을 수 있었다.


오븐, 에어프라이어, 전자레인지 그리고 심지어 밥솥 (플랫메이트가 홍콩인이었다)이 구비된 공용 주방은 우리의 식사를 책임지기에 훌륭했다. 혼자 밥을 먹을 때면 라면, 볶음밥, 파스타의 무한 사이클을 반복하는 나와 달리, 애인은 그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갈고닦은 자취 요리 솜씨를 뽐내기 시작했다. 비건 패티를 넣은 햄버거, 비건 미트볼 파스타, 비건 돈가스와 일본식 카레, 가지와 버섯을 곁들인 마파두부 등등. 요리를 원래 잘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애인이 선보인 식사는 비건 집밥에 대한 나의 빈약한 상상력을 깨기에 충분했다.


이런 식으로 며칠이 지나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분업이 이루어졌다. 찜찜한 기분을 못 참는 나는 쉬는 날이면 청소기를 돌렸고, 재택근무를 하는 애인과 달리 자주 입을 옷이 필요한 나는 빨래도 전담하였다. 애인은 일주일 치 식단을 미리 짜 겹치지 않으면서도 식재료가 상해서 버리는 일이 없도록 배치하였고, 나는 일이 끝나면 슈퍼마켓에 들려 양손 가득 장을 봐왔다. 내가 직접 요리한 저녁을 먹는 날도 종종 있었지만, 잠깐 한눈팔아 물이 끓어 넘치거나 싱겁게 간을 하는 내가 못 믿어웠는 지 대부분의 요리는 애인이 몫이었다. 토마토 파스타에도 간장과 고춧가루, 고추기름을 넣어 감칠맛을 내는 솜씨가 옆에서 볼 때마다 심히 대단하다고 느꼈다.


물리적 청소에 강한 애인은 정리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다 빼서 깔끔하게 닦고 그대로 다시 올려놓는 게 나라면, 그는 애초에 책상 위에 물건을 올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자주 쓰는 노트북, 책, 볼펜 등도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겨놓았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왔고 만에 하나 침대 위, 식탁 위에 내 물건이 보이면 어느샌가 정리해 놓고 나를 지적했다. 필요해서 꺼내놓았다는 변명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 그런 식으로 하나둘씩 물건을 올려놓은 책상 위에 “어라 책 펼 자리도 없네” 한 적이 많았기에 잘못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아직도 진행 중이긴 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한 공간에서 둘이 지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오랫동안 둘 만의 공간을 꿈꿨던 나에게도, 혼자 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 애인에게도 어쩌면 각자 포기하거나 감내해야 하는 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안다. 내가 화학적 청소에 희열을 느끼고 점심시간 짬을 내서 장을 볼 때 괜히 뿌듯하다는 것. 나의 애인이 정리의 달인이면서 어떤 요리이던 기가 막히게 간을 잘 맞춘다는 것을. 서로 모르고 있던 혹은 같이 살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동거’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이전 04화 웰컴 투 맨체스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