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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참외맛식혜 May 30. 2023

워터게이트 - 집 문제에 대처하기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지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아?” 살다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온갖 고생 끝에 마침내 우리는 맨체스터 시내에 작은 스튜디오를 얻었다. 그동안 수많은 서류와 끝나지 않는 절차에 지쳐 손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마냥 행복해야 하는 시간에 “집주인이 왜 우리를 선택했을까?”라는 물음을 허공에 던지기도 하고, 무거운 짐을 가까스로 이끌고 도착한 중개사 사무실에서 집 열쇠를 건네받을 때도 혹시 예상 못한 무언가가 기다리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애인은 미쳐 연차를 내지 못해 나 혼자 짐을 이고 지고 ‘우리’ 집에 막 도착했을 때, 짐을 마침내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실감이 났다. 한낮이었지만 거실 소파에 들어 누워 가만히 있던 그 순간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새로운 집, 새로운 주변 환경에 조금씩 적응하던 우리에게 불청객은 난데없이 찾아왔다. 저녁까지 잘 먹고 설거지를 마친 어느 날 밤. 우리는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침대에 막 누우려고 하던 참, 나는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아?” 희미하게 들러오는 물소리. 급하게 화장실을 확인했지만 아무 이상 없었다. 그때 침실 옆 작게 붙어있는 보일러실 문을 열었고, 우리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영국 대부분의 집에는 보일러룰 보통 베란다에 두지 않고 집 안쪽 작은 창고 같은 공간을 만들어 위치한다. 가스를 따로 쓰지 않는 우리 집의 경우 따뜻한 물을 쓰려면 무조건 보일러를 통해 데워진 후 물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그 커다란 보일러 한쪽 파이프에서 물이 콸콸콸,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쏟아지고 있었다. 급하게 손을 써보려고 했지만 말 그대로 끓는 물에 가깝게 뜨거웠고, 파이프를 연결하려 했지만 무슨 수를 써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나는 외쳤다. “내가 냄비 가져올게!” 국 하나 끓일 정도의 작은 냄비였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쏜살같이 부엌으로 달려간 나는 냄비 여러 개를 가져와 물을 받았고, 하나가 가득 찰 때마다 다음 냄비로 바꿔가며 바쁘게 날랐다. 보일러에서 쏟아지는 물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나의 안경을 뿌옇게 만들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X 됐다'라는 생각과 함께 울고 싶었다. 그렇게 3번은 왔다 갔다 했을까? 물이 드디어 멈췄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되었다. 카펫으로 된 바닥은 이미 쏟아진 물로 흥건했고, 파이프는 중간이 분리되어 있었으며, 마치 압력을 받은 것처럼에 한쪽이 찌그러져 있었다. 어떻게든 힘으로 다시 넣어보려 했지만, 이미 변형된 모양 탓인지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애인은 부모님에게 물어보겠다며 늦은 시간이지만 연락했고 나는 파이프를 요리조리 돌리며 어떻게든 다시 붙여보려고 아등바등 이었다. 주방용 집개를 가져와 이음새 밸브를 풀었고, 공간에 여유가 생긴 탓인지 가까스로 빠진 파이프를 연결하고 밸브를 있는 힘껏 잠갔다. 그리고 그 밑에 유리 용기를 끼워서 혹여나 내려오는 물에 의해 파이프가 다시 빠지는 걸 방지하는 것으로 우선 일단락했다. 


우리는 따뜻한 물을 쓰기가 두려웠다. 설거지도 샤워도 최대한 짧게 하고 작은 소리라도 나면 패닉에 빠져 보일러 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불과 며칠 뒤, 규모는 작았지만 두 번째 누수가 발생했고 첫날과 같이 냄비를 바쳐 물을 여러 번 날랐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우리는 바로 중개사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세입자 과실로 몰아갈까 봐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지만 평소에는 그렇게 느렸던 중개사에서 빠르게 일을 처리해 준 덕분에 다음날 바로 기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스위치 때문에 그래요.” 기사님은 보일러실에 붙어있는 작은 스위치를 가리켰다. 보일러를 더 빨리 돌리는 역할의 스위치가 켜져 있었고 그렇게 따뜻한 물이 탱크에 과도하게 쌓이다 보니 문제의 파이프로 배출되었다. 그런데 그 수압이 너무 쌔 파이프가 빠져 버린 것. 그렇다면 스위치는 애초에 왜 켜진 것인가? 이전 세입자만 알 문제였다. 파이프를 정비하고 스위치를 끈 기사님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다시 연락하라며 바쁘게 나가셨다. 그리고 우리는 해당 기사님을 우리 집에서 총 3번  보게 되는데... 


스위치를 끄자 이번엔 뜨거운 물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 아침마다 샤워할 때 물을 10분씩 틀어놓고 따뜻한 물이 나오길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물론 기다려도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필요할 때만 스위치를 켰다가 쓰고 난 뒤 바로 끄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라 결국은 다시 연락했다. 


다시 방문한 기사님은 이번엔 2명의 조수를 데려왔다. 그날은 내가 일하느라 애인이 대신 집에서 지켜보았는데, 보일러에 있는 물을 다 빼야 한다며 호스를 연결해 화장실로 연결하고 물을 비우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게다가 영국에서는 기사님이 집을 방문할 때 차를 대접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꽤나 한국스러운 점이라 나는 놀랐다.) 집에 컵도 2개밖에 없는데 3인분 차를 내오느라 꽤나 분주했던 것 같다. 특히 비건은 우리는 집에 우유대신 오트밀크만 두고 있는데, 한 명의 조수가 차에 들어간 오크밀크를 못 마땅해했다고 한다. (영국 사람들은 차를 마실 때 홍차를 우린 다음 약간의 우유와 설탕을 추가해서 마신다.) 참 가지가지 한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애인에게는 아마 악몽이었을 것이다. 


보일러 청소하는 그 난리를 친 뒤에도 결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우리는 반 포기 상태로 그다음 주 다시 기사님을 불렀다. 이번에는 나도 함께였다. 3번째 방문에도 기사님은 항상 평온한 얼굴이었다. 딱히 미안해하는 기색도 걱정하는 눈빛도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친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왜 문제가 아직도 있나고 성을 낼 것도 아니었다. (영국 사회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받는 입장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다만 서로 미안해하면서 예의를 갖추고 안 되는 것은 빨리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인 자세.) 우리는 부디 이번에는 문제가 해결되길 바라는 강렬한 마음을 눈빛과 말투에서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보일러 여기저기를 살펴보시던 기사님은 (이번에는 조수 1명과 함께였다) 보일러 위에 연결된 작은 스위치들을 보더니 이것이 문제였다고 알려주셨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보일러 세팅이 잘못되어 있어서 스위치를 켜지 않으면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것이라고. 금방 고칠 수 있다고. 그러더니 조수에게 이것저것을 알려주며 뚝딱 고쳐주셨고, 차를 내지 않을 정도의 짧은 수리라 나의 애인은 안도하며 기사님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마법처럼 그다음부터는 뜨거운 물이 잘 나온다. 처음부터 해결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영국에서는 해결 안 되는 문제도 많다는 것. 이 정도면 감지덕지다.  


지금도 예상 못한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보일러실로 달려가 확인한다. 아무 일 없이 모든 게 그대로 있을 때 비로소 원래 일로 돌아갈 수 있다. 우리 집이 생긴다는 건, 신경 쓸 일이 더 많다는 것, 해야 할 일이 늘었다는 것일까? 독립한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20대 후반이 돼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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