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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금태 Jan 23. 2021

쳇 베이커_목소리로 위로를 받는 것

관계의 상실에서 울려 퍼진 노래

 겨울눈도 겨울비도 유별난 스산한 1월이다.


 언제부터일까, 울컥 내 삶의 꼴사납고 부끄러운 감정의 격류에 휩싸일 때가 있다. 이렇게 스산하고 회색 빛 가득한 먹먹한 1월에는 더 심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새해가 되면, 삶의 목표를 세우고 희망을 품기보단 지나간 실패를 떠올렸다. 그것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다. 특히 몇 해 전부터는 사회생활을 하며 잃어버린 인연이 나의 맘을 무겁게 했다.

 관계의 상실은, 지난 몇 년간 가장 큰 실패로 나를 괴롭혔다. 단절된 관계에 대해 힘겨워하는 나를 보고 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 초년생이나 겪는 그런 걸로 뭘 그리 힘들어하냐고. 사람은 그렇게 지나가고 다시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사람은 채워질 거라며.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라고. 하지만 난 그게 쉽지 않았다. 내가 마음을 다해 좋아했었기에 그랬던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든 지금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눈이 많이 내렸던 1월의 어느 날.

 1988년 5월 13일 암스테르담, 새벽 세 시경 호텔 앞을 지나가던 행인은 길가에 피투성이 남자를 발견하였다. 경찰은 호텔 방 창문을 지탱하고 있던 빗장이 같이 떨어져 있던 것을 볼 때, 투숙객이 창문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추정했다. 특이한 점은, 사망한 남자가 트럼펫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아침이 되고 경찰에게 트럼펫을 소지한 신원미상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남자의 지인은 시체 공시소에서 시체를 확인했다. 시체 공시소의 안치된 그는 다름 아닌 감성적이며 지적인, 때론 우울함을 가득 품은 음악으로 사랑받은 쿨 재즈의 아이콘 쳇 베이커(Chet Baker)였다.


 쳇 베이커는 1929년 12월 23일 오클라호마 주의 예일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음악 쪽에 나름의 재능을 보였다. 이후 트럼펫을 접하며 음악을 본격적으로 익혔다. 하지만 이론 공부에는 흥미가 없어 악보 보는 법은 몰랐다고 한다. 일찍 프로가 되고 싶은 맘에 학교를 자퇴하고 육군에 입대, 군악대에서 연주를 연마하였다.

 군 제대 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였다. 이 당시 음악적 이론도 나름 공부했다 한다. 주변 음악인들과 다양한 연주 활동을 벌이며 내공을 쌓아가는 중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의 앨범 [Birth Of Cool]을 접하고 그가 앞으로 걸어갈 음악적 모토가 될 쿨 재즈 영역에 눈을 뜨게 된다.


 1949년 대마초 소지로 징벌성 재징집을 당하지만 약물과 불행했던 첫 번째 결혼 생활, 군대에서의 정신적 문제로 의가사 제대를 한다. 순탄치 못한 젊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약물에 취하고 불운했던 시간 속에도 음악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1952년 파시픽 레코드사의 제안으로 첫 녹음을 하게 되었다. 이때 녹음된 노래 중 <My Funny Valentine>은 이후 그를 상징하는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다. 1954년 트럼페터가 아닌 보컬로서 녹음한 [Chet Baker Sings]는 창백한 트럼펫 위로 그의 앳된 목소리로 불려지는 감미로운 발라드가 인기을 얻어 단숨에 재즈계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였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수려한 용모 또한 한몫하였다.

 초창기 연주자로서 내는 앨범과 보컬 앨범이 인기를 얻으며 나름의 입지를 쌓았다. 허나 이룩한 성과와 달리 대중적인 이미지가 강한 백인 연주자였던 그에게 당시 흑인 연주자들과 친 비밥 성향의 비평가들이 쏟아내는 냉랭한 평가는 피할 수 없었다.

Chet Baker (1929.12.23 - 1988.05.13)

 쳇 베이커는 음악에 열중했던 만큼 약물에도 심취하였다. 평생 그를 발목 잡았던 약물은 결국 그의 마지막까지 함께 했다. 그의 음악은 부유한 채,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방랑의 시간을 보냈다. 어찌 됐든 주변의 도움으로 이어진 활동은 재도약의 기회가 되었지만, 다시금 약물에 취했고 약물로 인해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말년의 그의 모습은, 젊은 시절 훈훈한 미소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하고 망가진 노인의 얼굴만 남게 되었다.


 1988년 쳇 베이커는 유럽 각지를 떠돌며 공연을 벌였다. 같은 해 4월 북부 독일 방송(NDR)에서 그의 단독 공연을 기획하였다. 방송국 소속 빅 밴드와 북독일 방송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함께 하는 대규모 공연이었다. 그의 생애 가장 화려하게 치러진 그 날의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 때 실황은 그가 남긴 마지막 녹음으로 남았다. 그는 이 공연이 끝나고 2주 후, 암스테르담에서 차가운 시체로 발견되었다.

Chet Baker  [My Favourite Songs: The Last Great Concert]

 쳇 베이커의 마지막 음성을 들을 수 있는 NDR 실황이 최근 국내 음반사에서 재발매되었다. 앨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생전 그가 좋아하는 노래가 두 장의 LP에 가득 차 있다.

 과거 이 앨범을 들을 때면 화려했던 청춘의 시절이 지난 노년의 허무만 느껴졌다. 나에게 늘 쳇 베이커의 음악은 항상 이랬다. 스스로를 망가트린 공허만이 메아리치는.

 하지만 다시 들은 앨범 속 그의 목소리와 연주는, 과거 내가 그의 음악에 가졌던 생각을 거침없이 깨트렸다. 노년의 그의 음악은 쓸쓸함과 허무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난 시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지난 삶을 관조하는 어른의 마음이었다. 특히 앨범에 수록된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이 거실을 가득 채울 때, 난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더 이상 내게 없는 것을 아쉬워하지 말라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상상을 하지 말라는 쳇이 내게 해주는 위로였다. 노랫말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 의미를 다시금 곱씹었다. 내가 만든 현실 속 결과를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다시 또 노래를 들으며, 나지막이 그의 목소리를 따라 해 보았다.  

'I get along without you very well'


 2021년 1월, 이제는 지나간 관계의 상실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이제는 더 이상 먹먹한 1월이 아니기를.

이번 달 내내 이 노래를 끼고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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