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비밀을 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참 뒤에 엄마가 조심스럽게 꺼낸 질문이다.
“너도 엄마 닮아서 그 맛을 잘 모르제?”
“그게 뭔데 엄마?”
“아! 그거 있잖아! 잠자리...”
“아!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어제는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까 내가 살아온 날들이 참말로 분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금껏 살면서 일만 죽어라 하다 보니 살림 맛을 알았것냐? 남녀 간에 느끼는 정을 알았것냐? 어제 섭이네 엄마랑 숙이네 엄마하고 옛날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람들을 그 맛을 알았댜. 그래서 한 번 하고 나면 몸이 개운했다는데 나는 한 번도 그 맛을 몰랐어. 오죽했으면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어서 저녁 내 일하는 척하면 니 아버지가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었겄냐. 그러면 나는 니 아버지 잠든 거 확인한 후에 방에 들어갔거든. 안 그러면 니들이 니 아빠보다 먼저 잘까봐 내가 니들을 깨워 놨었어”
엄마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린 시절에 부모님과 보낸 밤들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엄마는 매일 저녁 밥상을 물리면 당연한 듯 창출과 잔대, 도라지 등을 함박에 한가득 담아 방에 들어와서는 밤새 도라지 껍질을 까고 창출을 다듬으셨다. 그렇게 밤새 다듬은 창출과 도라지를 군불 지핀 부뚜막에 밤새 말려서 장날 약방에 내다 판 돈으로 우리 사남매 학비를 대 주셨다.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내가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가 아버지한테 너무 한 거 아녀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쩌다 한 번 할라치면 눈을 꼭 감고 누워서는 속으로 빨리 끝내고 내려가라고 기도를 했것냐?”
“아이구 우리 아버지가 불쌍했네요. 엄마가 억울한 게 아니고 아버지가 그런 마누라를 데리고 사느라 고생이 많으셨구먼유 뭘”
“니 아버지가 오죽했으면 나보고 나무토막에 대고 문지르는 것이 더 낳겠다고 욕을 해댔것냐? ”
“그럼 엄마! 제가 궁금해서 여쭤 보는 건데요. 그때 아버지가 외박하고 들어오신 날, 엄마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갔잖아요. 왜 그러셨던 거예요?”
“내가 평생 그 맛을 모르고 살았으니까 어디서 자고 오던지 말던지 화도 안 났어.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그냥 어디 가서 풀고 왔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도 살짝 있었던 것 같어”
“아이구 그런 게 어딨어 엄마? 엄마가 해도 해도 너무 했구먼”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넘어가니까 니 아빠가 그러더라. 저 너머 동네 정 씨는 살결도 뽀얗고 잘해주고 좋더만 이 느무 여편네는 나무토막보다도 못하니 원...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렇게 좋으면 그 정 씨한테 가서 해 달라고 하라고...”
오죽 엄마가 비협조적이었으면 아버지가 질투 작전이라는 극약 처방까지 썼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버지의 극약 처방에도 나무토막 엄마는 꿈쩍도 안했으니 아버지 심정 또한 오죽 답답했을까 싶다. 옛 속담에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는데 엄마는 돌부처의 뺨을 치고도 남을 양반이었다.
이처럼 젊은 엄마를 돌부처보다 더 강하게 만든 것은 쇳덩이보다 더 무겁게 엄마를 짓눌렀던 생존의 문제였다. 집안일에 통 관심조차 없는 남편 대신 어떻게라도 어린 자식들과 굶지 않고 먹고살아야 한다는 당면 과제가 급선무였다. 그래서 퉁퉁 불어서 줄줄 흘러내리는 젖 한 번을 금은보화보다 더 귀한 자식 입에 물리지 못한 채 곡괭이와 구럭을 메고 산을 헤집어 약초 캐는 일에 매달려야 했던 시절이다.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어보면 막내 동생이 울면 아침 녘에는 아랫집 섭이 엄마한테 가서 젖을 얻어 먹이고 오후에는 위뜸 효동이 엄마한테 젖을 얻어 먹이면 된다고 당부를 하고 꼭두새벽부터 산등성이를 향해 대문을 나서던 엄마 모습이 생생하게 떠 오른다. 그 당시 엄마 머릿속에는 오로지 창출과 잔대가 많이 나는 산등성이에 대한 정보들로 가득했다. 혹여라도 누가 먼저 가서 돈 되는 창출과 잔대를 캐 갈까 봐 새벽에 동트자마자 곡괭이와 구럭을 둘러메고 산으로 향했던 시절이다.
어느덧 그 좋은 젊은 날을 뒤로한 채 아버지 마저 십 년 전에 먼저 떠나보낸 후 홀로 팔순이 된 엄마는 요즘 들어 그동안 살아온 생애를 반추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지난 생의 비밀 보따리의 매듭을 조심스레 하나씩 나에게 풀어놓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