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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Jun 26. 2023

중앙슈퍼 막내딸

“내가 그 얘기 다 하자면 밤을 새워. 사흘도 새워. 그런데 미역국은 뭘 이리 많이 가져왔대요?”

“중신 잘못 서면 뺨이 석 대라는데, 미역국이라도 끓여 바쳐야지, 내가.”

은주네가 웃었다. 

“헤어질 거면 후딱 헤어지지, 새끼는 왜 싸질러가지고 그 고생을 하는지. 내가 아주 죽겠어요, 언니.”

그러게 말이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경자는 속엣말이 절로 튀어나올 뻔했다. 

“은주가…… 연정에 내려오겠다네요. 슈퍼 자리에서 장사를 해보겠다고.”

“그게 뭔 소리야? 여기서 무슨 장사를 해?”

“그러게 말예요. 언니, 내 속이 젓갈이 다 됐어.”

젓갈이 될 만도 했다. 노인네들로 가득한 이 동네에서, 거기다 비워둔 지 10년도 더 된 가겟자리에서 무얼 한다고. 도대체 무얼.

사실 40년 가까이 한동네에서 살다 보면 비밀이 있기 어려웠다. 은주가 결국 두 살배기 아들을 들쳐업고 연정에 내려왔을 때 동네 사람들은 다 눈치를 챘다. 굳이 입 대는 사람은 없었지만 곰국을 끓여 들른다거나 말린 가자미를 몇 마리 들고 오는 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집마다 결혼 안 한 자식들이 하나쯤 있는 것처럼 이혼한 자식들도 흔해서, 경자 씨는 가만 보면 자신만 둘째의 이혼 사실을 숨기고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결혼식을 그렇게 거창하게 해놨으니 내가 차마 딸년 이혼했단 말을 못 하는 거지! 나도 사람인데 민망스럽잖아!”

남편 상태 씨에게도 몇 번이나 단도리를 했고 아들 내외에게도 그랬다.

“어머니, 은주가 다 알 텐데. 은주가 지윤이 찾아가서 막 울고불고했다면서요? 괜히 말 안 하고 있다가 나중에 어머니만 우스워져요.”

며느리의 말에도 경자 씨는 털어놓질 못했다. 

은주가 내려오고 며칠이 지난 후 경자 씨는 그 집 대문을 또 빵 걷어찼다. 

“아줌마가 미안해, 은주야.”

“아우 참, 아줌마! 그게 뭐예요? 이상하잖아요!”

어릴 때부터 싹싹했던 은주는 잘도 웃었다. 그늘졌을까 봐 걱정했는데, 둘째만큼이나 말짱해 보여 다행이었다.

“아줌마가 회까닥 미쳐가지고서 너를 시집을 보내버렸어. 고생시켜서 진짜로 미안해.”

“저, 사업해서 잘살 거예요. 하나도 걱정하지 마세요. 돈 엄청 벌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무슨 돈을 버나…… 경자 씨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아이를 업은 은주네가 찐 옥수수를 들고 나와 경자에게 내밀었다. 지금 옥수수가 입에 들어갈 일인가. 마음이 다 짜부라질 판인데. 

“그래, 이혼이 뭐 대수냐. 잘살아 봐라. 불쌍하게 살면 내가 니년을 먼저 죽일 것이야.”

으르렁거리는 제 엄마 앞에서 은주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었다.

“나쁠 게 뭐 있어? 꼴 보기 싫은 놈 버리고 왔는데. 나는 아주 그냥 세상 시원하네.”

“그럴 거면 애는 왜 싸질러, 싸지르긴.”

“엄마. 내가 결혼은 빵점으로 했지만 그나마 남은 게 요 새끼야. 남자 버리고 친구 데려왔잖아!”

요년이 딱 우리 둘째구나. 둘째도 저딴 소리를 잘도 지껄였는데. 경자 씨는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럼 차라리 딸을 낳지! 늙어서 친구라도 하게!”

“엄마 웃긴다? 아들이 어때서?”

은주네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나는 세상에서 남자 새끼들이 제일 싫어. 아주, 아주 싫어!”

은주의 남동생은 은주가 연정에 내려오기 직전 중앙슈퍼집에 들러 법석을 떨어대고 갔다. 빤했다. 이혼한 누이가 엄마 혼자 사는 집을 덜컥 먹어버릴까 봐 안달이 난 거였다. 이혼한 주제에 동네 망신스럽게 애 데리고 내려오는 게 보기 싫다며 핑계를 댔지만 속내는 누가 봐도 집이었다. 

“야, 이 새끼야. 니 누나가 이혼하느라 혼이 탈탈 털려가지고 엄마한테 와서 좀 지내겠다는데 도와주겠단 말은 못 할망정 그게 할 소리냐?”

집 팔아봐야 1억이나 간신히 나오려나, 경자 씨는 은주네의 하소연에 말을 잃었다. 멀쩡히 철강회사에 잘 다니던 은주네 남편은 벌써 20년도 전에 바람이 나 집을 떠났다. 어느 년이랑 잘산다는 소문도 한때 돌았지만 자식새끼들 결혼식에도 오지 않은 걸 보면 어디서 혼자 쭈그렁바가지 노인네로 늙고 있는 모양이었다. 굶어 죽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지. 남자 새끼 싫다고 소리를 치면서도 손자는 또 물고 빠네. 그런데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너, 은주 세탁소 할 거라는 거 알고 있었냐?”

경자 씨는 놀란 마음을 달래며 지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탁소가 아니라 빨래방.”

“그러니까, 그게 그거지.”

“좀 달라. 아무튼 빨래방이 왜?”

“걔가 돌았냐?”

경자 씨는 진심으로 놀랐다. 은주는 연정시가 있는 도내 국립대학, 그것도 경영학과를 나온 애였다. 그런 애가 세탁소라니. 

“아니, 그년이 지 엄마 생각은 안 해? 어디 대학까지 나온 년이 엄마 사는 동네에서 세탁소를 하냐? 제정신이냐? 지 엄마 망신을 줘도 분수가 있지!”

“빨래방이라니까. 그리고 그게 어때서? 그거 요즘 엄청 핫해. 엄마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은주 하는 거 봐서 잘되면 나도 하나 차릴까 싶은데?”

“이것들이 쌍으로 돌아버렸나!”

경자 씨는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빈말 잘 하지 않는 둘째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니 가슴이 막 후들후들 떨려왔다. 이 망할 년들.

기함을 한 건 은주네도 마찬가지였다. 은주네는 경자 씨가 있는 자리에서 눈물을 철철 흘렸다. 

“내가 니년 삯빨래 시킬려고 대학을 보냈니? 차라리 어디 먼 데 숨어 삯바느질을 하든지. 여기선 안 돼. 난 그 꼴 못 봐.”

은주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딴 덴 가겟세 때문에 못 가. 삯바느질은 돈도 안 되잖아? 그리고 난 바느질할 줄 몰라.”

잘났다, 참말로 잘났다…… 남의 집 딸이라 대놓고 욕은 못 했지만 경자 씨도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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