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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Jun 26. 2023

라일락 1호점

봄 햇볕은 포슬포슬하기가 말도 못 했다. 갓 찐 백설기를 살짝만 식혀 손바닥에서 살살 부스러뜨린 뒤 바람에 날리면 아마 이렇게 촉촉하고 부드러울 것이다. 지윤은 커다란 은색 트렁크를 쾅, 소리 나게 마당 앞에 내려놓았다. 4미터 폭 좁은 골목 안 세 번째 집의 나지막한 담장은 고작 지윤의 허리 높이였고 대문이 들어갈 자리는 비어있었다. 그러니까 밖에서 마당과 집이 훤히 보이고 아무나, 아무 때나 드나들 수 있는 대지 쉰다섯 평, 건평 스물다섯 평의 이 집 오른쪽 담장에는 작은 간판이 달려 있었다. 네모나게 자른 머틀 나무에 글자를 새긴 동판이었다. 라일락 1호점, 이라 쓰인 글자가 선명했다. 지윤은 문패를 한참 바라보았다. 

“내 실력이 괜찮긴 하지? 저만한 퀄리티를 아무나 내는 게 아니라고.”

뒤에 섰던 주영이 으스댔다. 그럴 만도 했다. 주영은 호주 타즈매니아 산 머틀 나무를 사들여 끝없이 사포질을 한 후 미네랄 오일을 정성스럽게 먹였다. 그 고생을 모르는 바 아니어서 지윤은 주영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아무리 봐도 도마 같은데?”

주영 옆에 선 은규가 비아냥거렸지만 주영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안 들어가, 엄마?”

지윤을 바라보며 시큰둥한 목소리를 낸 건 여덟 살 반지였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지 3주가 된 반지는 노란 나비가 그려진 분홍색 책가방을 메고 있었다. 왼손에 들고 덜렁덜렁 흔드는 신발주머니도 같은 색이었다. 

“들어가야지! 우리 반지, 새집으로 출동!”

연두가 반지의 등을 밀었다. 네 여자와 반지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키 작은 자목련 두 그루가 꽃봉오리를 피웠고 담장 위로 개나리가 솟아 있었다. 서울에 비해 연정 시(市)는 따뜻한 곳이었다. 붉은 아네모네와 노란 앵초가 벌써 피었고 분홍 버베나도 마당 한가득이었다. 주황색 메리골드까지 꽉꽉 들어차 그야말로 이곳은 꽃집 마당 같았다. 대문 자리에서 현관까지는 동그란 디딤돌을 여러 개 깔았는데 지름 삼십 센티짜리 디딤돌에조차 꽃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마당이 조금만 더 넓었더라면 담장 따라 매화나무를 심는 건데.”

주영의 말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안 돼, 나무는 집을 가리잖아. 이 정도가 딱 좋아.”

지윤이 주영의 에이프런 어깨 끈을 매만지며 말했다.

지은 지 38년이 막 넘은 낡디낡은 연정 주택단지 안에서 이만큼 눈에 띄게 예쁜 마당이 있는 집은 오직 이곳, 라일락 1호점뿐이었다. 이 마당을 만든 건 전부 주영이다. 지윤은 오늘 밤 주영의 볼에 열일곱 번쯤 키스를 해줄 생각이다. 반지는 디딤돌 주변을 채운 조그만 파쇄석을 파사삭 밟으며 현관으로 뛰었다. 두꺼운 나무 현관 도어락 버튼을 꼭꼭 누르는 반지의 손등이 통통했다. 매사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 습관이 있는 반지였지만 손놀림이 빠른 걸 보니 어지간히 신난 모양이었다. 현관문을 열자 봄 햇볕이 사람보다 먼저 마루로 뛰어들었다. 집수리를 하느라 석 달 동안 매일 드나들던 곳이지만 집 안은 마치 처음 보는 풍경처럼 그들에게 다가왔다. 마음이 벅차올랐다. 반지가 제일 먼저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마루로 올라섰다.      

“예쁘다…….”

모두 듣긴 했으나 누가 한 말인지는 몰랐다. 모두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으므로 누가 했는지는 상관없었다. 

모든 게 작은 집이었다. 언뜻 미니어처처럼 보일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작은 마루에는 노랗고 통통한 2인용 소파와 푸른 체크무늬 1인용 소파, 그리고 베이지색 스툴이 있었고 의자들 가운데 동그란 유리 테이블이 놓였다. 정남향으로 난 통창으로 주영의 작품인 꽃밭이 펼쳐졌고 마침 덜 핀 자목련 꽃잎이 팔랑,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연한 나무색 창틀은 마치 액자 같았다. 이 집의 주인 지윤은 순백색 창틀을 원했지만 여기는 라일락 주택수리 회사의 모델하우스나 다름없었다. 연정 주택단지의 주 고객은 나이든 어르신들이고 그들이 순백색 창틀을 원할 리 없었으므로 연두는 지윤의 청에도 불구하고 나무색 창틀을 시공했다. 이제 와 지윤은 후회가 없었다. 이제껏 살던 아파트에서 보이는 뷰와는 결코 같지 않았다. 자목련 꽃잎처럼 발개진 지윤이 창가 풍경에서 돌아서자 반지가 발칵, 현관문 오른쪽으로 난 제 방의 문을 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반지는 모든 장난감을 단호히 처분했다. 인형 한 개 남기지 않았다. 장난감 수납장을 뺀 반지의 살림은 침대와 책상뿐으로 단출했다. 방이 작아 연두가 특히 고민을 많이 한 공간이었다. 마당을 향한 창문 아래 긴 책상을 놓기 위해 침대 발치를 방문 쪽으로 잡아당겨 배치했다. 대신 침대 헤드 쪽으로 유리 파티션을 달았다. 책상 쪽 풍경이 다 보이지만 침대 공간은 아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그란 곡선으로 제작한 유리 파티션을 반지는 가장 좋아했다.

“연두 이모는 천재 같아. 어떻게 이렇게 예쁜 방을 만들 수 있지?”

입을 반쯤 헤벌린 반지를 연두는 품에 꼭 안았다. 

“이모가 인생을 다 바쳤지! 우리 반지 기쁘게 해주려고!”

침대 옆으로는 작은 화장대와 책장이었다. 가지고 싶은 걸 반지는 다 가졌다. 적어도 반지 말로는 그랬다. 어릴 때부터 작업실 책상에 앉아 일하는 지윤을 보며 자라 반지도 작업실 긴 책상을 갖고 싶어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1학년이 쓰기에는 다소 긴 자작나무 책상을 창 아래 놓은 것이었다. 절반은 숙제용, 절반은 작업용이라고 반지가 말했는데, 그 ‘작업’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아마 반지도 모를 것이어서 묻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종이접기나 그림 그리기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안방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응접실을 만들었다. 그건 지윤의 꿈이기도 했다. 폭신하고 작은 꽃무늬 소파와 나무 테이블을 놓을 수 있는 공간, 좋아하는 그림과 포스터를 걸 수 있는 벽과 미니 냉장고, TV 대신 스크린을 설치하고 늦은 밤 영화를 볼 수 있는 곳, 그런 곳 말이다. 연두는 그걸 만들었다. 잔꽃무늬 벽지까지 바르려던 지윤을 겨우 뜯어말리고 은규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레이색 페인트를 칠해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드는 방이었다. 지윤은 냉장고에 맥주와 소주를 가득 채워 넣었다. 이제 밤마다 네 여자가 모여 이곳에서 소맥을 말게 될 것이었다. 

너무 작아 드레스룸으로밖에 쓰지 못할 것 같았던 마지막 방이 지윤의 침실이었다. 

“침대랑 책상, 그것만 있으면 돼. 그러니 여길 내 방으로 쓸래.”

작아도 너무 작았다. 싱글침대를 놓고 긴 책상 하나를 두니 바퀴 달린 작업용 의자를 놓을 수도 없었다. 허리가 아프겠지만 작은 나무 의자를 두었다. 어차피 그림을 그릴 것 같지는 않았다. 당분간은 라일락 주택수리 회사에 몰두해야 할 것이었다. 싱글침대도 걱정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이제껏 끌어안고 자던 반지가 제 방이 생겼다고는 해도 언제 지윤의 침대로 기어 들어올지 모르는데 자칫 밤마다 좁은 침대에 끼어 자느라 허리가 분질러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반지를 믿어볼밖에. 

드레스룸으로 생각했던 방에 침실을 만들 수 있었던 건 뒤란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래전 이 집의 주인은 집과 뒷담 사이 공간을 막아 바닥을 올린 뒤 뒤란으로 썼다. 습기나 곰팡이가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말짱했고 가로로 긴 뒤란을 온전히 드레스룸으로 만들 수 있었다. 주방도 작았다. 레몬색 도장 싱크대를 넣고 원형 식탁을 두었다. 밥이야 지윤의 엄마인 경자 씨네 집에서 먹게 될 터이니 문제 될 일은 없었다. 서울의 서른세 평 아파트에서 일찌감치 처분할 것은 처분하고 온 살림이라 괜찮았다. 어울리지 않게 터무니없이 넓은 욕실은 반으로 뚝 잘라 벽을 세우고 세탁실로 만들었다. 욕실 타일을 노랑과 초록으로 한 건 순전히 지윤의 고집이었다. 

“모델하우스고 뭐고 다 몰라! 욕실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샤워기마저도 빨강이었다. 빨강 실리콘을 씌운 샤워기를 직구하기 위해 지윤은 무던히도 애를 썼다. 욕실 문을 열어본 반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유치해.”

여섯 살짜리에게 유치하다는 말을 듣는 건 꽤 충격이었으나 그래도 지윤은 흐뭇함을 감출 수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빨강 샤워기를 쓰는 사람은 몇 안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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