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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Jun 26. 2023

판타지아테일즈

지윤은 판타지아테일즈의 수석 일러스트레이터였다. 

맞다. 당신이 알고 있는 그 판타지아테일즈. 13년간 유저 수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최장수 온라인게임. 지윤은 13년 동안 게임회사에서 그림을 그렸다. 스물네 살에 신입으로 들어오자마자 운 좋게 판타지아테일즈 디자인실 멤버가 되었고, 판타지아테일즈가 대박이 났으므로 지윤의 연봉은 착착 잘도 올랐다. 회사는 아예 사명을 판타지아테일즈로 바꾸었다. 이제 IT 단지의 전설이 된 그곳에서 지윤은 게임 속 세상을 뛰어다니는 여전사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이직이 잦은 게임 업계라지만 판타지아테일즈를 두고 한눈을 팔 똥멍청이는 그리 흔치 않았다. 게다가 지윤은 젊기까지 해서 지치지도 않았다. 회사 몰래 외주를 받아 밤을 새운 날도 많았다. 일러스트 가격은 천차만별이지만 장당 50만 원부터 스케일이 큰 그림은 300만 원까지도 받았다. 손이 빠른 지윤은 연봉의 절반 정도를 외주 고료로 챙길 수 있었다. 좋은 날이 영영 계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난봄, 지윤은 사람들이 빽빽한 지하철 안에 서 있었다. 게임회사가 밀집한 판교역이 가까워지자 딱딱한 백팩을 멘 청년들이 점점 많아졌고 지윤은 자꾸 밀려났다. 백팩 좀 앞으로 돌려 메지, 짜증이 나서 홱 돌아섰는데 눈앞에 광고판이 들어왔다. 지하철 한 칸을 가득 메울 기세로 쭉 붙은 그림.

‘지금 세계를 집어삼킬 전사들이 나타났다!’

거창한 카피 아래 열두 명의 여전사가 있었다. 하나 같이 머리통보다 더 큰 맨가슴을 반쯤, 아니 그보다 더 드러내고 속옷을 겨우 가린 짧은 치마에 가터벨트를 한 하얀 허벅지. 머리카락을 세차게 휘날리며 단단한 부츠를 신었지만 얼굴과 눈동자는 지극히 소녀 같은. 

팀장이 된 지윤은 출근하자마자 팀원들이 내미는 그림을 받아들고 빠르고 친절하게 지적했다. 여전사의 풍만한 가슴 아래로 내려간 네크라인을 손끝으로 톡톡 치며 “2밀리만 더 내려볼까?” 말하거나 가슴골을 톡톡 치며 “더 발라, 윤기. 반짝반짝하게.” 말하고 더불어 Y존도 가리켰다. 

“여기도.” 

그러면 팀원들은 그림을 도로 받아 몇 시간 후 더 완벽하게 이상한 소녀들의 그림을 가져왔다. 회의실 프로젝터가 켜지고 소녀들의 그림이 빠르게 지나가고, 패배한 적 없는 팀원들이 밝게 웃는 동안 지윤도 그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아무도 듣지 못하게 중얼거렸다. 지겹다, 지겨워…… 아, 진짜로 지겹네.

지하철 광고판 그림을 보면서 지윤은 문득 주머니 속 손가락이 쑤셨다. 그림을 숱하게 그리고 잠이 든 밤이면 손가락부터 통증이 올라와 어깨가 굳어버리곤 했다. 그날 밤도 그럴 것이 빤했다. 고단함과 통증은 현금으로 교환되는 것이어서, 그래서 고통스럽지도 고독하고 우울하지도 않았더랬는데. 그런데 지하철 안에서 지윤은 속이 부대꼈다. 탱크톱 위로 삐져나오는 가슴살의 윤기를 그리기 위해 태블릿 펜을 들고 얼마나 덧칠을 해댔는지, 더 통통하고 탐스러운 Y존을 그리기 위해 몇 번이나 색을 섞고 빛 효과를 넣었는지 떠올랐다. 

광고판의 여전사 열두 명은 모두 지윤의 팀이 그린 것이었다.

지하철 한 칸을 다 차지한 귀엽고 섹시한 여자들. 판타지 속 세상에서 정신없는 전투를 치른 뒤 집에 돌아가 남편에게 안겨 “오늘 전투는 너무나 무서웠어요. 안아주세요.” 할 것만 같은 이상한 소녀들. 13년 동안 지윤이 만든 이상한 소녀는 대체 몇 명이나 될까. 저절로 혼잣말이 터지고 말았다.

“미친…… 썅년.”

백팩들에 밀리느라 지윤에게 어깨를 바싹 붙였던 여자가 화들짝 놀라 몸을 뗐다.

“그쪽한테 한 말 아녜요.”

토라진 사람처럼 지윤이 여자에게 말했다.      

지하철에서 여전사 열두 명과 맞닥뜨린 날부터 시작된 몸살은 닷새가 지나서야 말끔해졌다. 몸을 추스르자마자 지윤은 휴직을 했다. 그리고 집수리 6개월 과정 클래스에 등록해 하루에 일곱 시간씩 수업을 들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전등이 나가면 예스맨을 불렀다. 깔끔하게 유니폼을 차려입은 예스맨들은 5천 원에 전등을 갈아주었고 전구를 사 오는 일까지 맡기면 8천 원이었다. 낡은 소파를 밖으로 내어주는 일은 두 명의 예스맨이 필요했으므로 만 원이었다. 할 줄 아는 친구에게 부탁해도 되는 일이라지만, 그랬다가는 전구 하나 갈아주고 온갖 생색을 다 낼 것이 빤했고 그 김에 지윤의 집에 눌러앉아 찜닭이나 시켜 주말을 온통 동낼 것이어서 돈은 돈대로, 시간은 시간대로 날려 먹기 딱 좋았다. 예스맨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랬던 지윤이 6개월 동안 전기와 배관을 배우고 도배와 페인트 도장도 배웠다. 드르르륵, 드릴 끝에서 경첩이 문짝에 박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명치 끝에 오래 얹혔던 묘한 응어리들이 싹 갈려버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이제 연두네 회사에 들어가 실무를 배워볼 생각이었다. 규모는 작지만 알짜배기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였다. 알바 자리라도 준다면 연두를 따라다니며 쏙쏙 배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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