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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가 김서령 Jun 26. 2023

우리의 슬픔은 사소하다

연두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지윤은 따뜻한 라떼 두 잔을 쟁반에 받쳐 들고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은 연두에게 다가갔다. 초콜릿 무스 케이크 한 조각도 함께였다. 연두가 냉큼 몸을 일으켜 라떼를 집는 바람에 그의 매끌매끌한 단발머리가 찰랑 흔들렸다. 

“아, 맛있다!”

후후 불며 한 모금 마신 연두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이 집 주인은 지옥에 갈 거야. 라떼 한 잔에 8천 원이라니. 지옥엘 안 가고 버티겠어?”

맞는 말이었다. 지윤도 수긍했다.

“해도 해도 너무하지. 지옥 갈 거야.”

연두가 이번에는 지윤을 보며 눈을 흘겼다.

“별꼴이야, 정말.”

“뭐가?”

연두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지윤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렇게 싫었다며? 한순간도 같이 살기 싫었다며? 그래서 헤어졌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비쩍비쩍 말라? 잘된 일 앞에서 왜 얼굴이 반쪽이야?”

지윤이 픽 웃었다. 카페 유리창에 잠깐 모양새를 비춰보았다. 말랐나?

“다이어트 중인데.”

“웃기시네.”

거짓말이긴 했다. 

하지만 연두의 말처럼 비쩍 곯지는 않았다. 연두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늘 제 편 야윌까 봐 걱정이고 제 편 고달플까봐 마음 졸이는 법이니까. 누가 뭐래도 연두는 지윤의 편이니까.

연두가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물었다.

“지윤이 너, 나 좋아하지?”

지윤이 웃으며 끄덕였다. 연두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내가 다 좋아?”

“응?”

“왕연두의 모든 것이 다 좋냐고.”

그럴 리가. 시원시원하고 발랄한 거야 최고지만 가끔 그게 과해 남 보기 민망할 때가 열 번 중 세 번이고, 아무데서나 소리를 빽빽 지르고 아무랑 싸움도 잘 붙는 연두가 어찌 다 좋을까? 하지만 구구절절 설명은 하지 않기로 한다. 지윤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니.”

지윤의 대답에 연두가 말했다.

“왕연두가 다 좋은 건 아니지만 넌 왕연두를 만나면 행복하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뻔뻔함과 당당함. 연두는 그래서 사랑스럽다. 지윤이 대답했다.

“그렇지.”

“그게 왜 그런지 알아? 밤 되면 제집으로 각자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런 것 같다. 지윤은 까르르 웃었다. 역시 연두는 맞는 말만 한다. 같이 살지 않으니 좋은 모습만 보고 헤어지면 그만이지. 연두가 물었다.

“그런데 넌 왜 엑스를 미워해?”

“미워하긴 뭘 미워해? 반지 때문에 자꾸 마주치다 보니 싸울 일이 생겨서 그렇지. 미운 게 아니라 불편한 거야.”

지윤은 고작 1년을 살고 헤어졌다. 그러고선 양육권 소송만 2년을 했다. 아무래도 판사가 지윤 부부의 소송 건을 까먹은 게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아주 대차게 넌더리 나는 시간을 지나왔는데 반지가 한참 자라도록 넌더리는 끝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여태 지지고 볶았다. 

“왜 불편해? 이제 그냥 친군데. 미워하면서 살다가 헤어졌어. 헤어져 주다니 얼마나 고마워? 예뻐할 수도 있을걸? 이젠 밤에 니네 집에 안 와. 얼마나 좋아? 이제 친구 하면 되는 거야.”

속도 좋은 연두 같으니. 

연두가 말을 이었다.

“난 현준이랑 친구 하면서부터 그렇게 좋더라? 헤어지고 나니까 헤어져 준 게 고마워서라도 난 현준이가 좋아지던데? 만나면 반갑기까지 해!”

“그건 니들이 또라이라서 그런 거고.”

얼마 전 연두의 인스타에 현준이 댓글을 단 것도 보았다. 커다란 망고빙수 앞에 두고 환하게 웃는 연두의 사진에 현준은 “츄릅, 망고빙수 대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댓글을 달았고 연두는 하트를 꼭 찍어 놓았다. 놀고들 있네, 지윤은 반지를 재우고 나오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하도 기가 막혀 웃어버렸다. 

물론 연두와 현준은 지윤과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상견례에서부터 싸움박질을 시작하는 양가 부모들을 말리기 위해 둘은 덜컥 혼인신고부터 했고, 양가 부모들이 원만히 합의에 이르자 둘은 결연히 파혼을 선언했다. 쓸데없이 내지른 혼인신고 때문에 이혼 절차를 거치느라 성질이 나서 연두와 현준은 더 싸워댔다. 결혼식도 안 해보고 이혼녀, 이혼남이 되었다고 둘은 나중에도 계속 싸웠다. 

“난 이제 현준이가 그 무슨 찐따 짓을 하고 다녀도 괜찮아. 내 남자 아니잖아. 난 찐따 친구들 많지만 걔들이 찐따라서 싫진 않아. 밤 되면 지들 집으로 돌아가는데,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말 같다. 그러고 보니 지윤은 그래서 연두를 예전부터 좋아했다. 대부분의 슬픔이 연두 앞에서는 사소해졌으니까. 

“그딴 일, 아무것도 아냐, 지윤아. 슬픈 일 축에도 안 껴.”

연두가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지윤이 잘랐다.

“됐고. 슬픈 일 같은 거 없고. 나, 니네 회사에 취직시켜 줘.”

연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경력 없는 사람 아무 쓰잘머리 없단 거 알아. 일 배우고 싶어서 그래. 인턴도 좋고, 최저시급만도 고맙고.”

“회사는? 그만둘 거야?”

“응.”

“돌았어? 그만큼 돈 주는 회사가 어딨다고?”

지윤도 자신이 조금 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판타지아테일즈의 연봉은 업계 최고였다. 연두가 지윤의 표정을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냐? 나 그만뒀는데?”

생각지도 못한 연두의 말에 지윤은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 왜?”

연두가 코끝을 찌푸렸다.

“그럼? 왕연두가 지금 백수야?”

응, 대답하며 연두가 끄덕였다.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백수를 하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지윤은 억울했다. 나는 어쩌라고.

“엄마한테도 말 안 했는데 너한텐 해야 하는 거였어? 백수 해도 되냐고 허락받아야 했던 거야? 이 나이에?”

지윤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 진짜…… 너만 믿고 6개월 동안……”

“6개월 동안 뭐?”

연두의 표정이 새삼 심각해졌다. 

지윤은 구구절절 그간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집수리 코스를 들었다는 지윤의 말에 연두는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니가 왜 배워?”

“사업하려고.”

“무슨 사업?”

“주택 리모델링 회사 차리려고.”

“돌았어? 미친 거 아냐?”

연두는 망설이지도 않고 욕을 했다.

“왜?”

지윤은 진짜 몰라서 되물었다.

“꼴랑 집수리 코스 6개월 듣고 집을 고치겠다고? 뭐, 리모델링?”

“니네 회사에서 실무 배우려고 했지.”

연두는 코웃음을 쳤다.

“와, 배지윤. 진짜 인생 쉽게 생각한다? 돈 거 아님?”

“아, 몰라! 짜증 나! 너 때문에 다 망했어!”

“별꼴이네. 나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갑자기 계획이 꼬인 지윤이 하도 소리를 빽빽 질렀더니 연두는 급기야 뭔가 대단한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주눅 든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계획이 있으면 진작 말을 하지. 하긴 그래 봐야 소용은 없었겠지만. 한 판 붙었거든, 사장이랑. 거나하게. 그 김에 좀 쉬어가려고 그만뒀지. 나야 뭐 혼잣몸이니 쉬엄쉬엄 가도 괜찮잖아?”

연두네 회사에서 좀 배운 뒤 연정으로 내려가려 했는데 이렇게 어그러질 줄이야. 

“그런데 왜 하필 연정이야? 니네 엄마, 너를 죽일 거 같은데?”

연두가 지윤의 엄마 흉내를 내며 으르렁거렸다. 연두 얼굴이 정말 엄마 같아서 지윤은 으으으 엄살을 떨었다. 정말 연정에 도착하기도 전에 맞아 죽을지 몰랐다. 주택 리모델링 사업이라니. 말이 안 되는 소리이긴 했다. 

이게 다 은주 때문이다. 1년 전 연정으로 돌아가 빨래방을 개업했던 은주가 더없이 환하고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와 안부를 전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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