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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Jul 21. 2020

005_토를 달지 말라는 말

여름은 아침에 과일을 깎아서 먹었고

설거지한 그릇들을 건조대에 놓고 출근했다.

여름이 출근한 사이에

그릇들을 하나씩 꺼내 정리하다가

과도를 발견했다.

여름이 사용한 그릇을 내가 정리해야하는데 약간 기분이 상했고

과도가 날이 위쪽을 향한 상태로 그릇과 섞여있는 것에 더 기분이 상했다.


손을 다치지 않았으나

손을 다칠 뻔 했다고 생각했고

그날 저녁에 여름에게 따졌다.


"칼을 씻었으면 바로 칼집에다가 넣어야지."

"왜 그래야하는데?"

"칼을 그렇게 놓고 간 걸 내가 모르잖아. 

생각없이 손 뻗다가 다칠 수도 있다고."

"나 일하는 데서는 바로 안 넣어. 칼 녹슨다고."

거기서 나는 낮부터 쌓아온 짜증를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부엌 일에는 토를 달지 말래?"


그건 내 말을 잘 듣지 않는 여름에게 수동적인 형태의 공격을 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듣자 

여름은 나에게 맞서 싸우는게 아니라

잔뜩 실망한 얼굴을 취했고

나는 얼굴의 핏기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스스로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나도 모르는 새 여름의 의견을 무시하려고 했고

그녀의 말을 막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며.


나는 곧

토를 달라지 말라는 말은 위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말이고

나에게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지 말라는 뜻에서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 그런 식의 사고방식이 작동했을 것이고

여름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한 컵의 물이 바다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말은 쉽게 드러나지만 그 말이 나오게 된 과정을 다 보여줄 때가 있다.

사랑은 관계의 다른 표현형이고

때로는 가장 익숙한 표현들이 상처를 주니까.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기에 고민 없는 말과 행동은 언제나 치명적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한다.


나는 그 후로 여름에게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다. 

물론 그걸 안다고 단시간에 많은 것이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내가 조금 더 빨리, 쉽게 잘못을 인정하고 있음을

다행이라고 여긴다.

사랑에도 흔히 권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걸 바라지 않을 수 있고

그렇지 않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우리 둘 중 누군가 (물론 대부분 내가) 권력을 휘두르는 일을 막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내가 여름에게 사과를 했을 때

여름은 나에게 드디어 네 안에 있는 가부장적 모습이 나왔다며...

나와 미래를 함께할 수 있을지 고민된다고 했다.

그건 내게 매우 치명적이었고,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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