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는 보통 시댁에서 2박을 하고 명절 당일에 친정에 들러 점심이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보낸다. 시댁이 멀리 있어서 가는 날은 오전에 일찍 출발해도 오후 늦게 도착하게 되어 어영부영 하루가 지나간다. 다음날(명절 전날)은 오전에 음식 준비를 하고 나면 오후 시간에는 무료하게 뒹굴거리면서 보내게 되고, 명절날 아침에는 일찌감치 차례를 지내고 바로 시댁을 나서서 친정으로 향한다.
사실 이렇게 일정을 놓고 보면 시댁에 그리 오랜 시간을 머무는 것도 아니고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어서 별로 힘들 것도 없지만, 며느리라는 입장 때문에 명절이 돌아오는 것이 그리 반갑지 않다. 시어머니 주도 하에 심부름 정도로만 하던 음식 준비는 해가 갈수록 점점 내 몫이 커져가고, 한해가 다르게 노쇠해가시는 시부모님은 뵙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내 몸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등이 배기는 불편한 잠자리는 신체적으로 점점 더 힘들어지는데, 거기에다가 그러려니 하고 흘려듣던 부모님의 걱정 섞인 잔소리는 자식 나이가 환갑이 되도록 줄어들지를 않으니 명절에 시댁에서의 이틀 밤은 여전히 버겁기만 하다.
그런데 올 설에는 남편이 지방에 일이 있어서 며칠 먼저 시댁으로 가고, 나는 따로 내려가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내려갈 때는 항상 명절 이틀 전에 내려갔지만, 혼자서 가게 되었으니 이번에는 좀 요령을 피워보기로 했다. 명절 전날에 내려가서 하룻밤만 자고 올라오기로 한 것이었다. 대신에 음식은 내가 집에서 다 만들어서 가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일이라 기차 편이 없어서 버스표를 예매했지만, 설 연휴에 폭설 예보가 있어서 새벽에 알람을 맞춰놓고 예약 대기까지 걸어놓으며 겨우 기차표를 한 장 구했다. 하지만.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라고 했던가. 눈이 많이 왔다고 내려오지 말라고 하시는 어머님 말씀에 못이기는 척 가지 말까 고민했지만, 그 말씀이 진심이 아닌 걸 잘 알기에 그냥 내려가기로 했다.
온통 흰 눈으로 덮인 창밖 풍경을 감상하며 기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마치 여행을 가는 것처럼 즐거웠다. 시댁에서 하룻밤만 자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기차역까지 마중 나온 남편과 시부모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으로 며느리 의무방어전이 시작되었다.
자그마한 시골집 방안에 모여앉아 엉덩이를 지지며 부모님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눈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쏟아졌다. 툇마루 너머로 앞마당에 하얀 눈이 쌓여가는 모습이 낭만적으로 느껴지던 것도 잠시, 점점 많이 쌓여가는 눈이 슬슬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저녁 뉴스에서 이 지역의 폭설 소식을 보았다며 괜찮은지 안부를 묻는 지인들의 문자도 계속 이어졌다.
설날 새벽, 제설작업을 하는 차 소리에 잠이 깼다. 문을 열고 내다보니 마당에 눈이 엄청나게 많이 쌓여있었다. 마치 뉴스에서나 보던 눈 쌓인 강원도 산골의 어느 오두막집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어머님도 이렇게 눈이 많이 온 것은 처음이라고 하셨다.
여느 설날 아침처럼 차례를 지내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마을 입구로 들어오는 경사길이 눈 때문에 미끄러워서 차가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새벽에 한 차례 제설을 하기는 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눈이 더 내렸고 쌓인 눈이 얼어붙어서 차의 통행이 불가능해진 것이었다.
다른 명절보다 시댁에서 하루를 덜 머무르게 된 만큼 부모님께도 더 잘해드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명절을 보내야지 생각했는데, 시댁에 꼼짝없이 갇혀버리게 되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아름답게 보이던 새하얀 눈도 꼴보기 싫어졌다.
남편은 군청 민원실과 읍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조치를 취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명절 연휴라서 해결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명절에도 쉬지 못하고 제설작업을 해주시고 민원 전화에도 친절히 응대해주시는 공무원들에게 더이상 무리하게 요구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에는 이번에도 시댁에서 이틀 밤을 채우는구나 생각하니 속이 상했다. 으레 2박 3일을 지낼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하룻밤에 한껏 들떠서 평소보다 더 힘을 내고 있었던 참이라 더 기운이 빠졌다. 게다가 눈은 계속 오고 날도 추워서 언제쯤 나갈 수 있게 될지 모르니 좀처럼 힘이 나지 않았다.
그때 상심한 며느리의 마음을 읽으셨는지 갑자기 아버님께서 삽을 들고 나가셨다. 눈이 얼어붙은 길에 직접 흙을 뿌려서 길을 터주시겠다고 하셨다. 따뜻한 방안에 있어도 어깨가 시리는 날씨에 말도 안 된다고 만류해 보았지만 아버님은 막무가내셨다.
얼떨결에 채비를 하고 마을 입구까지 차를 몰고 갔다. 아버님은 길에 얼어붙은 눈 얼음을 삽으로 쳐내고 그 위에 언 땅을 파서 흙을 조금씩 뿌리셨다. 남편이 차를 운전해 올라가다가 미끄러지면 그 부분에 또 흙을 뿌리시기를 반복하셨다. 미끄러지는 차에 행여라도 사고가 날까 봐 그만 하시라고 말려도 아버님은 계속하셨고, 결국 경사길을 올라갈 수 있었다.
차를 멈추면 다시 뒤로 미끄러질까봐 아버님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그 길로 그냥 출발하게 되었다. 한 손에 삽을 들고 다른 손으로 잘 가라고 손짓하시는 아버님의 모습이 백미러로 보이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기껏해야 일 년에 두세 번 부모님을 뵙는 건데 시댁에서 고작 이틀을 자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게 안달했나 하는 자책이 들었다. 늘 자식을 생각하고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시려는 부모님의 사랑을 때로는 과하다고 타박했던 지난 일들이 죄송스럽게 느껴졌다.
거동이 불편하신 시어머니는 마당에 쌓인 눈이 다 녹을 때까지 당분간 집 밖으로 나오시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아파트에 사는 아들이 눈 때문에 별일 없는지를 먼저 걱정하신다. 앞으로 눈이 오면 이번 설에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고생하시던 아버님이 생각날 것 같다.
부모님에 대한 죄송하고 감사한 지금의 마음이 부디 다음 명절까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