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누와라엘리야
누와라엘리야는 마니아가 생길만한 요건을 갖춘 도시다. 나도 스리랑카를 전역을 여행하며 오래 머문 도시로 누와라엘리야를 손꼽는다. 앞서 이야기한 색다른 명소와 굵직한 경험뿐 아니라 이곳의 일상도 잔잔하고 포근했다. 마침 뚝뚝 운전의 핵심 두 가지 기술을 익힌 뒤로 어느 곳이나 쉽게 다닐 수 있었다.
하루는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암베웰라 목장(Ambewela Farm)에 갔다. 원래 호튼 평원을 다녀오는 길에 들르려고 했지만 정비소가 급해서 건너뛴 젖소 농장이다. R은 이곳에서 목장을 구경하고 신선한 유제품도 먹을 수 있다며 기대했다. 도대체 이런 것을 어떻게 찾아내는지, R의 재주는 놀라웠다. 암베웰라 목장은 R의 기대처럼 괜찮은 곳이었다. 하지만 안타갑게도 목장이 문을 닫고 폭우까지 내려서 젖소가 뛰노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목장에서 운영하는 카페는 이런 아쉬움을 달래기 충분했다. 메뉴는 무척 다양했다. 나는 뜨거운 우유를 마셨다. 고소하지만 약간 맹맹한 우유에 설탕을 두 스푼 넣었더니 어찌나 달고 맛있던지, 추위를 가시고 힘이 났다. R은 우유 셰이크를 마시며 맥도날드 아이스크림이 녹은 맛이라며 나름대로 만족했다.
목장 카페를 나와 피자헛에 갔다. 뜨겁고 기름지며 입안을 가득 채우는 식감과 고소하고 짭짤한 치즈가 그리울 때면 피자만한 게 없다. 데빌(devil) 피자를 주문했다. 데빌은 스리랑카 전역에 퍼진 대중적인 음식으로 맵고 강한 풍미가 특징이다. 데빌은 만능 양념이다. 새우, 돼지고기, 닭고기 등 어떤 재료를 섞어도 맛있는 요리가 된다. 우리로 치면 제육 양념과 비슷하다. 매운 정도는 가게마다 다른 데, 관광객이 적은 곳에 갈수록 맵다. 우리나라 불닭 소스는 데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오죽하면 이름도 악마겠는가. 피자헛의 데빌 피자는 살짝 매콤한 것이 어느 외국인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했다.
터미널 근처 시장에 가서 사롱(sarong)을 두 벌씩 샀다. 사롱은 스리랑카를 비롯해 남아시아에서 주로 입는 전통옷이다. 직사각형 모양의 커다란 천을 허리에 둘러 치마처럼 입는다. 더울 때는 속옷까지 바람이 술술 통해 시원하고, 비가 내리면 끝단을 걷어 허리춤에 넣으면 반치마가 된다. 무엇보다 디자인과 색감이 무궁무진하다. 패션에 관심이 있다면 안 사고는 못 배긴다. 보따리 상이 될 수도 있다. 가격도 1,000루피 내외. 여행을 마칠 때까지 한 달 동안 사롱 3~4개를 돌려 입었다. 여행 경비 중 옷값은 한국에서 먹는 치킨 한 마리보다 쌌다.
사마한(samahan)을 처음 이야기한 것도 R이다. R은 모르는 게 없다. 그녀의 세심한 관찰력과 관심은 여행을 풍요롭게 했다. 사마한은 스리랑카의 국민 감기약 역할을 한다. 피곤할 때, 몸이 으슬으슬할 때, 몸살 기운이 있을 때 사마한을 마신다. 누와라엘리야의 추위, 극심한 일교차에 시달릴 때면 사마한을 마시며 기운을 북돋웠다. 사마한은 강한 생강 맛에 여러 향신료가 섞였지만 입맛에 거슬리지 않았다. 효능이 신통해 한국에도 많이 사왔는데, 연세 드신 부모님의 일상 차로 대리 효도까지 했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것은 노트르담 호텔(Notre Dame D'Arcadia)에서 먹은 만찬이다. 띨리나(Thilina Hotel)호텔 대신 잡은 노트르담 호텔 방은 곰팡내가 심했다. 잔뜩 흐리고 비 오는 날씨 때문에 종일 해가 들지 않으니 보송보송한 침구를 기대하는 건 욕심이었다. 새 옷을 꺼내 입어도 젖은 옷을 걸친 것처럼 축 늘어지는 눅눅한 방이었다. 지역 특성이며 날씨 문제인데 호텔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이 호텔을 소개하는 건 마음은 보송보송하게 편히 지냈고, 마지막 식사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는 예약제 식당을 운영했다. 너무 외진 곳이라 우연히 찾아오는 손님이 있을 리는 없고, 투숙객도 시내 맛집을 먼저 찾을 테니 주방은 닫혀 있었다. 손님 없는 빈 식당은 늘 우리 차지였다. 영화 속 대저택에서 귀족들이 모여 까르르 웃고 즐길 것 같은 큰 식탁과 고가구 가게에서 비싼 값을 부를 것 같은 의자와 진열장이 눈에 띄는 아늑한 공간에서 사마한을 마셨다.
퇴실을 이틀 앞두고 다음 날 먹을 소고기 스테이크, 치킨 스테이크를 비롯한 플레이트 세트를 예약했다. 추위와 연이은 고된 트레킹에 지친 저녁, 우리는 큰 식탁에 차려진 음식에 감동했다. 맛과 양, 분위기 모두 완벽한 만찬이었다. 스리랑카판 백종원이 이 숨은 맛집을 컨설팅해서 널리 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는 고풍스러운 식당, 오직 한 테이블만 가득 채운 음식, 언 몸을 녹이는 따뜻한 스프, 기대 이상의 풍미를 가진 스테이크, 넉넉한 빵과 과일까지. 그땐 정말 허기를 달래고 기운을 북돋아 줄 든든한 음식이 몹시 간절한 때였다. 왜냐하면 신의 발자국에 다녀오느라 온몸의 기운을 다 써버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