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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드 Oct 21. 2024

Ep 20. 엘라 산책(리틀아담스피크)

[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엘라


한 달 전 엘라에 처음 왔을 땐 거머리를 피하느라 땅만 보고 걸으며 나인 아치 브리지에 갔다. 그때 머물던 숙소는 리차드 홈스테이(Richard Homestay)라는 작고 허름한 곳으로 주인 할아바지의 이름이 리차드였다. 리차드 할아버지는 나보다 맑고 귀여웠다. 하지만 가끔 너무 짠해서, 왜 이런 곳에서 혼자 사는 거야, 라며 괜한 오지랖을 떨기도 했다. 첫 마디를 조금씩 더듬는 그는 투박한 손으로 간단하지만 알찬 아침을 차렸다. 그의 온기를 먹고 나선 긴 산책, 30분 만에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는 나인 아치 브리지였다. 누구에게나 스리랑카 여행 버킷리스트가 되는 곳이다. 다리와 터널을 배회하며 사진을 찍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기차에 매달린 사람들의 상기된 얼굴, 터널을 지날 때 울리는 함성이 어울려 여행자의 기운이 골짜기를 향해 강하게 퍼졌다. 아산카 카페에서 수박 주스를 마시며 기차가 내뿜는 경적이 길게 들릴 때는 살짝 떨렸다.    



카페를 나와 언덕을 기다시피 올랐다. 리틀아담스피크(Little Adam`s peak)로 가는 길. 이제 더 이상 작명에 흔들리지 않았다. 카페 주인이 알려준 길을 제대로 찾기 힘들었다. 달동네 미로찾기처럼 더 어려워진 길. 그래도 동네 구경삼아 걸었다. 어느새 차밭이 나타났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인데도 드문드문 숙소가 보였다. 하동 정금차밭에 있는 단금정처럼, 차밭 고랑을 옆에 둔 정자처럼 단아한 숙소였다. 오래 머물기 좋겠다, 고립되기 좋겠다, 종일 아무것도 안 해도 좋겠다, 늦잠 자고 영화보고 술 마시고 그리고 별 세기 좋겠다는 한량 욕구가 일었다. 언젠가 찻잎 따는 여인과 작은 트럭으로 짐 나르는 남자가 이웃이 될 때까지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미로를 빠져나왔는지 리틀아담스피크로 향하는 여행자 무리가 보였다. 졸래졸래 줄지어 동네 뒷산 같은 리틀아담스피크에 올랐다.


리틀아담스피크는 아담스피크처럼 종교적, 문화적,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엘라를 대표하는 전망대라서 하이킹 코스로 인기가 좋다. 나처럼 시내에서부터 걸어올 수도 있지만 뚝뚝을 타고 온 사람도 많이 보였다. 뚝뚝을 타고 오더라도 마지막에는 동네 뒷산을 오르듯 숨이 한 번쯤은 헐떡이는 등산을 20분 정도 해야 한다. 나는 나인 아치 브리지에서 45분 정도 걸렸다.

리틀아담스피크에 오르면 마주보고 있는 또 다른 봉우리인 엘라 락(Ella rock)이 보인다. 높은 두 봉우리 사이에는 깊은 계곡, 엘라 갭(Ella gap)이 있다. 두 곳 모두 위용이 어마어마하다고 하는데 구름에 가려 한눈에 보기 힘들었다. 한순간 구름이 걷히자 엘라 갭과 엘라 락이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여행자는 이 광경을 보기 위해 누가 툭 건들면 계곡으로 떨어질 것 같은 비탈에 한참 머물렀다.     


누와라엘리야에서 고산 지역을 탐험하며 지친 탓인지 엘라 전망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짧게 머문 후 돌아오는 데 짚라인(Flying ravana adventure)을 탄 사람들이 보였다. 산악바이크와 클라이밍, 메가점프 등 액티비티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나는 발이 땅에 붙어있어야 안심이 된다. 높은 곳에도 올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여행자에게는 청량한 탄산음처럼 여행에 짜릿함을 더해 줄 것이다.     



잠시 쉴 겸 고른 곳은 리틀아담스피크 트레일 초입에 있는 바(Ravana Pool Club)였다. 야외 수영장을 감싸고 있는 바에 자리를 잡고 맥주를 주문했다. 덩치 큰 백발의 노부부가 예쁜 수영복을 입고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선글라스를 쓰고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여행자도 보였다. 나처럼 한가롭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     

나는 가끔, 아마 오늘처럼 여행에 삐칠 때면 다른 여행자를 관찰하며 동질감과 이질감을 함께 느끼곤 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만난 서양 배낭여행자들은 분명 동아시아 여행자보다 자유로운 대신 때론 무모하며, 위트 있고 지랄 맞았다. 대체로 거리낌 없는 편이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언덕이나 해변에서 셀카를 찍는 대신 책을 읽는다거나 비를 맞으면서도 개의치 않고 쭉쭉 걸었다. 갓난아이를 업고 먼지가 풀풀 나는 도롯가를 걷는 장기 여행자 부부도 대부분 서양인이었다. 이런 모습은 이들의 일상을 쉽게 유추하게 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동아시안인은 일상과 여행의 경계를 확실히 나누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여행을 마치면 다음 여행을 꿈꾸며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간다.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어떤 이미지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의 주인공은 혼자 어디론가 떠나 고행을 겪은 뒤 돌아와 영웅이 되었다. 단순한 플롯이지만 영웅의 여행이 시사하는 의미는 여전히 크고, 국가와 분야를 막론하고 실용적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것이 여행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한 다큐멘터리 작가의 강연에서 ‘여행이 고될수록 글이 나온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 말에 속이 후련해졌다는 것은 내가 어느 정도 여행을 숙제처럼 여긴다는 의미였다. 여행은 왜 특별해야 하는가. 여행은 왜 힘들고 고독해야 하는가, 여행을 이렇게 고귀하게 해석하는 뿌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여행에서 얻은 성찰과 감동을 사명감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여행을 부추기는 동시에 내가 옳다고 여기는 영웅의 고행을 은근히 강요했다. 아마 앞으로 쓸 책에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써야 할까 망설여진다. 이때 오랫동안 여행기를 써 온 선배 작가의 강연에서 들은 말도 떠올랐다. 작가로서 글을 쓰면 논란과 오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 어쩌면 그것은 새롭게 잘 쓰고 있다는 의미라는 말이었다. 소신과 아집 사이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잘 쓰고 잘 고치려 노력하겠다.     


엘라에서의 긴 산책은 이렇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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