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엘라
(이 글은 '와일드 스리랑카 2편'의 첫 번째 글입니다.
스리랑카 1편 URL : https://brunch.co.kr/brunchbook/kore-lank-a1 )
누와라엘리야를 떠나 엘라로 가는 길. 이제 더 이상 뚝뚝에 관한 걱정은 없었다. 뚝뚝의 엔진소리는 안정적이었다. 며칠 동안 쏘다녔더니 고산 지대 커브 길도 익숙해졌다. 속도를 줄이고 방향을 바꾸고 다시 속도를 높일 때마다 딱 들어맞는 기어를 넣고 액셀은 필요한 만큼만 살짝 당겼다. 뚝뚝은 낮잠이라도 자듯 조용히, 커브길이 마치 오선지 위의 음표인 것처럼 리듬감을 가지고 달렸다.
엘라 시내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한 일은 빨래방에 가는 것이었다. 누와라엘리야에서는 눅눅한 날씨 때문에 빨래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추위와 트레킹 때문에 두꺼운 빨래 거리도 쌓였다. 속옷과 겉옷은 하루치 밖에 남지 않았다. 빨래방 몇 곳을 둘러본 후 세탁부터 건조까지 하루 만에 해주겠다는 곳에 빨래를 맡겼다. 새삼 뚝뚝 로드트립이 기특했다. 뚝뚝이 아니었다면 무거운 빨래를 들고 이곳저곳 헤매는데 시간과 체력을 써버렸을 것이다.
빨래방을 나와 숙소인 골드 캐빈(Golden cabin)으로 갔다. 식당을 겸하는 아담한 숙소는 밥맛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골드 캐빈은 엘라 시내 큰길에서 150m 밖에 떨어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급경사였다. 다시 긴장감이 들었다. 이런 급경사에서는 브레이크를 힘껏 밟아도 제동거리가 길고, 멈췄다 출발할 때 뒤로 밀리기 때문에 상당히 주의해야 한다. 이럴 때는 한국과 세이셸의 험지에서 수동 승용차를 운전한 경험과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스쿠터를 타며 경험한 비포장도로 살피는 눈이 큰 도움이 되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작전을 짰다. 작전명은 나인 아치 브리지(Nine Arch Bridge)를 즐기는 모든 방법이라고 하겠다. 나인 아치 브리지는 스리랑카 여행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손꼽히는 동시에 엘라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이다. 1921년에 만들어진 이 다리는 길이 약 91미터, 높이 약 24미터로, 9개의 아치형 구조가 특징이다. 콘크리트와 돌로 만들었지만 100년 넘게 기차가 다닐 정도로 견고해서 당시의 건축 기법과 양식을 증명한다. 고산 지대의 울창한 숲속과 골짜기에 지은 다리, 그 위를 천천히 달리는 낭만적인 기차, 기차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람들의 모습은 수많은 여행자를 엘라로 유혹한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평생 SNS 프사로 쓸 만한 인증 사진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시행착오 끝에 얻은 팁은 다음과 같다.
1.하이킹, 걸어가기
처음 엘라에 왔을 때, 나인 아치 브리지까지 걸어갔다. 시내에서 30분 정도 걸렸다. 풀숲을 걷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하지만 거머리가 너무 많았다. 바닥에서 촉수를 곧추 세우고 덤블링하는 거머리의 모습은 겁 많은 나를 하얗게 질리게 했다. 때마침 앞서가던 백인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거머리는 비오는 날 논길에 모습을 드러낸 지렁이처럼 사방에 깔려 있었다. 거머리에 대한 공포심만 빼면 좋은 하이킹이었다. 나인 아치 브리지가 초승달처럼 휘는 곡선을 보려면 이 각도가 가장 좋다.
2. 카페에서
나인 아치 브리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노상 카페가 몇 곳 있다. 그중에서 아산카 카페(Asanka Cafe)가 가장 접근성이 좋다. 다리 끝 지점에서 가파른 길을 5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입장료는 없지만 조금 비싼 음료를 주문해야 한다. 자릿값이라 생각하면 합리적이다. 이곳에서는 나인 아치 브리지가 그믐달처럼 휘는 곡선을 볼 수 있다.
3. 다리 위에서
앞에서 다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경을 감상했다면 다리 위에서는 과감하고 특별한 사진을 남기기에 좋다. 다리 위에 걸터 앉거나, 난간 위를 걷는 여행자가 많았다. 나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말린다고 안 할 것도 아니니까 말하자면, 발목에 힘 딱 주고 무게중심은 선로 쪽으로 살짝 기울이는 게 좋다. 유일한 안전장치다.
4. 기차 안에서
엘라에 처음 올 때 기차를 탔다. 나인 아치 브리지를 지날 때 기차에 매달릴 계획을 세웠다. 3시간 동안 콩나무 시루 같은 기차간에서 버티며 엘라에 도착했을 때, 다리는 보지도 못하고 내려야 했다. 나인 아치 브리지는 엘라-데모다라(Demodara) 사이에 있는 다리이다. 엘라보다 한 정거장 먼 역을 예약해야 이 다리를 지날 수 있다는 뜻. 처음엔 이 단순한 것조차 몰랐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짠 작전은 뚝뚝으로 기차 추격하기였다.
엘라에서 데모다라로 가는 기차 시간표, 데모다라에서 엘라로 가는 기차 시간표를 구했다. 그리고 뚝뚝으로 기차보다 먼저 가서 기다렸다. 뚝뚝을 기차역 앞에 세워두고 나인 아치 브리지를 지나는 딱 한 구간만 기차를 탔다. 택시를 타고 돌아온 적도 있고,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간 적도 있다. 오전 3시간 만에 나인 아치 브리지를 네다섯 번 지난 것 같다. 그동안 기차가 휘는 각도에 따라 몇 번째 칸이 사진이 잘 나오는지, 오른편, 왼편 어디서 고개를 내밀거나 매달려야 하는지 요령을 익혔다. 하지만 사진은 잘 나오지 않았다. 사진의 완성은 얼굴이라는 건 기차에 매달려서도 통하는 진리였다. 그리고 기차 밖으로 몸은 던지듯 과감한 연출이 중요한데 나 같은 쫄보가 잘 해냈을리 없다.
5. 뚝뚝을 타고
한 날은 뚝뚝을 타고 나인 아치 브리지 가장 가까운 곳까지 갔다. 여행자를 태운 뚝뚝 운전사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원래 길은 아니었지만 수많은 여행자를 나르다보니 자연스럽게 생긴 좁고 어려운 길이었다. 기차 시간에 맞춰 도착한 수많은 뚝뚝이 칡뿌리처럼 얽히고설켜 있었다. 뚝뚝 운전사들은 이곳까지 뚝뚝을 몰고 찾아온 내가 기특했는지 기꺼이 주차 자리를 양보했다. 난 호의를 받은 김에 한술 더 떠 주차까지 부탁했다. 그곳은 1c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을 만큼 정밀한 운전이 필요한 곳이었다.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아마 스리랑카 여행을 결심했다면 나인 아치 브리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혹은 스리랑카에 대한 관심이 없더라도 이 다리에 대한 사진이나 영상은 낯이 익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스리랑카보다 유명한 게 이 다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인 아치 브리지의 환상은 여행자가 쫓지 못할 만큼 과장된 것은 아니다. 만약 엘라에 간다면, 나인 아치 브리지를 제대로 즐겨 보길! 이 다리는 아는 만큼, 투자한 만큼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