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엘라
엘라는 히피나 집시가 좋아할 만한 도시다. 일단 기후가 좋다. 대충 걸쳐 입어도 살아진다. 엘라의 고도는 누와라엘리야보다 1,000m 정도 낮아서 가습기처럼 짙고 끝없는 안개와 습기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저지대와 달리 더위를 피할 수 있는 해발 1,000m 고지대인만큼 아침, 저녁에는 에어컨 없이 지낼 정도로 서늘하다. 엘라의 여행자거리는 짧고 요긴하다. 왕복 2차선인 엘라 로드를 따라 밥집, 카페, 술집, 편의점, 은행, 옷가게, 빨래방, 우체국 등의 핵심 시설이 400m 정도 거리에 집중되어 있다. 하루만 이 거리를 다녀 보면 금방 길눈이 트이고 필요한 곳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엘라에는 엘라만의 감성이 있다. 엘라에 있는 가게와 상점 주인들은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트렌드에 맞춘다. 개성과 유행을 자연스럽게 꼬아 만든 동아줄로 반항아도 옭아매는 힘이 있다. 이 덫에 걸려 엘라에서 장기 체류 중인 여행자가 여럿 보였다.
엘라의 밤은 낮과 다르다. 흩어져 있던 여행자가 모이는 엘라의 밤거리는 씩씩한 광대 같다. 낮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화려하고 재치있는 네온 사인이 켜지며 공연의 시작을 알린다. 친구가 된 지 얼마 안 된 여행자들이 무리 지어 거리로 입장한다. 나처럼 메뉴판부터 살피는 사람, 고개를 들어 가게 분위기가 어떤지 기웃거리는 사람, 이미 기분이 고조된 사람도 보인다. 낡고 왜소한 건물 입구를 나름대로 잘 꾸몄지만 엘라의 감성은 그보다 크다. 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제야 경계 없는 엘라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집집마다 콘셉트와 인테리어는 다르지만 몇 가지 단어가 엘라의 여행자거리를 관통하는 것 같다. 러브(love), 피스(peace), 프리돔(freedom), 네이처(nature), 보헤미안(bohemian) 같은 밥 말리가 떠오르는 낱말들이다.
엘라의 밤거리에서 가장 두드러진 곳은 원 러브 카페(Cafe One Love)다. 엘라 기차역에서 가깝고 여행자거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어디서든 눈에 띈다. 이곳은 24시간 영업한다. 이른 새벽이나 아침에는 썰물처럼 사라진 손님 대신 고양이나 강아지에게 밥을 주는 직원들이 보인다. 아침 기차를 타고 이제 막 엘라에 도착한 신참 여행자에게 먼저 인사해 엘라의 첫 인상에 기여하는 것도 원 러브 카페가 하는 일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진한 사랑이 넘치는 시간은 역시 밤이다. 넓은 카페는 통일성이 없다. 한쪽에는 그네 의자, 맞은 편은 원두막 같은 좌식 공간, 또 다른 쪽은 누울 수 있는 죽부인 공간 등 개성이 넘친다. 울긋불긋 핀 조명은 창문을 넘어 온 달처럼 서늘해진 밤공기를 비춘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낯선 레시피의 칵테일을 마시며 한마음처럼 자유롭다. 집을 나선 이유도 다르고 모습도 다른 데 하룻밤만은 자유로운 여행자로서 결을 같이 한다. 이것이 엘라다.
엘라의 다른 카페나 식당도 마찬가지다. 밤이 되면 조금씩 돌변한다. 이틀 동안 들른 피자집의 화덕은 모닥불처럼 낭만적이고, 낭만으로 구운 피자 토핑은 낮보다 화려한 것 같다. 맥주도 1도 정도 세졌는지 취기가 오른다. 2층 창가에 앉아 밤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 그게 그렇게 기분이 좋다.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사람을 눈물샘이 막히도록 눈에 가득 담을 때, 나도 못지 않게 행복해진다.
어떤 날은 기찻길 바로 옆에 있는 술집에 갔다. 아래층은 숙소, 위층은 식당인데 손님이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영업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맥주를 몇 병 마셨다. 아래층에 있는 화장실에 가는데 투숙객으로 보이는 여자가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음악은 오로지 그녀가 쓴 헤드폰에만 흐르고 있었으니 이 광경은 내게 고요 속의 몸부림으로 보였다. 안경 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분명히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가 무의식적으로 춤추는 여자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녀는 마치 조회 때 훈시 중인 교장선생님처럼 단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지루함은 없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녀를 지나쳐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보고 나오는데 그녀는 벽에 기대 팔장을 끼고 아까의 나처럼 웃고 있었다.
“잘 추더라.”
“고마워. 좀 웃기지?”
“아니, 부러워서. 계속 춰. 여긴 엘라잖아.”
“너도 재밌게 놀아. 여긴 엘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