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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드 Nov 20. 2024

Ep 36. 미리사, 대왕고래를 찾아서

[와일드 스리랑카] 뚝뚝 타고 스리랑카 일주 3,375km  미리사

미리사에 처음 도착한 날 저녁, 숙소인 수와아라나(Suwa Arana) 주인은 내 여권을 확인하며 자연스럽게 고래 투어를 권유했다. 나는 아쿠아리움도 가보지 않았을 만큼 해양 동물에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R은 달랐다. R은 지나가는 동네 똥개 한 마리도 그냥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귀엽고 무해한 생명체를 좋아했다. R은 고래가 바다의 댕댕이처럼 뛰노는 모습을 떠올리는 듯했다. 고래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 R을 위해서 슬쩍 흥정을 시작했다. 숙소 주인아저씨가 제시한 가격에서 20퍼센트를 깎았다. 얼마가 제 가격인지 몰랐지만, 일단 깎고 보자. 고개를 가로저은 아저씨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 운이 좋네요. 내일 아침 일찍 픽업하러 올 거예요.”     


전화를 끊은 아저씨는 활짝 웃었다. 이미 고객을 차곡차곡 모아서 출발이 확정된 배에 두 사람을 조금 싸게 태워주는 눈치였다. 아저씨는 티켓 두 장을 내밀었고, 나는 옆에 있는 아주머니에게 돈을 지불했다.


 

다음 날 아침, 약속된 시각에 맞춰 뚝뚝 기사가 데리러 왔다. 아마 숙소 주인 부부의 아들이거나 친척일 것이다. 그는 졸음이 가시지 않은 눈꼽 낀 얼굴로 뚝뚝을 몰았다. 10분쯤 달리자, 미리사 항구에 도착했다. 수많은 배 중에서 우리가 탈 배를 한 번에 찾은 그는 뚝뚝을 멈추고 한 남자를 따라가라고 가리켰다. 투어가 끝나면 같은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뚝뚝을 보냈다.

배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2층에는 약 30명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다행히 다른 여행자보다 빨리 도착했는지 앞자리가 비어있었다. 나는 두 번째 줄 가장자리에 앉았다. 넓이에 비해서 키가 큰 배는 출발하기 전인데도 흔들림이 컸다. 본능적으로 멀미를 각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만석이 되었고, 선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유창한 말솜씨로 분위기를 한껏 띄웠다.


배가 출항했다.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은 고객들을 살뜰하게 챙겼다. 수박과 바나나, 비스킷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과일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스리랑카 특유의 밝고 순수한 미소와 인사를 곁들였다. 여행자 사이에는 아침 바람처럼 기분 좋은 분위기가 흘렀다. 배가 항구를 빠져나가 인도양 속으로 진격했다. 멀리서 한가로워 보이던 바다는 생업이 한창이었다. 공중 그네 서커스처럼, 돛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사람들을 태운 배가 지나갔다. 서로 손을 흔들었다. 선장은 이들에게 고래의 위치를 물었다. 고래를 수소문해서 찾아 나서는 고래 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분쯤 지나서 항구가 까마득히 멀어졌을 때, 선장이 소리쳤다.     

“우리는 지금 돌고래 놀이터에 들어왔어요. 백 마리는 넘을 거예요. 돌고래 쇼를 보세요.”     

저 멀리서 돌고래 수십 마리가 뛰어올랐다. 매끈하고 탄탄한 등이 물밖으로 보였다. 빛 내림에 반짝이는 윤슬처럼, 튀어 오른 돌고래 무리는 반짝반짝 빛났다. 경주마처럼 달렸다. 크고 굵은 꼬리를 흔들 때마다 물살을 가르며 파장을 일으켰다. 돌고래는 제트기보다 빠르고 제비처럼 유연했다.

배는 천천히 돌고래 곁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돌고래가 배 바로 아래에서 튀어 올랐다. 한 마리, 두 마리, 그리고 연이어 수십 마리가 이 배를 어미 고래로 여기듯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훈련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돌고래의 특급 서비스였다.     

“자, 이제 대왕고래를 찾아가 봅시다. 어제는 운이 좋아서 고래를 봤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오늘 날씨는 좋은 편이고, 왠지 감이 좋아요. 여러분 운이 좋은 편인지 시험해 봅시다. 레츠고우.”


배는 항구에서 더 먼 곳, 더 깊은 곳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다. 배는 심하게 요동쳤다. 꽤 심한 멀미를 느꼈다. 난간을 잡고 토하는 여행자도 생겼다. 나도 두통이 시작됐다.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자꾸 고개는 아래로 꺾이고 몸은 움츠러들었다. 애써 먼 곳을 보고 어깨를 폈다. 대왕고래를 만날 수 있을까.



배는 대왕고래 포인트에서 시동을 끄고 부표처럼 표류했다. 다른 여행사의 배들도 이곳에 몰려들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멈췄다.     

“고래다!”     

그 순간 멈춰있던 배들은 권투선수의 주먹처럼 순식간에 속도를 높여 한 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대왕고래가 다시 나타나길 기다렸다. 대왕고래는 10~15분 간격으로 숨을 쉬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온다. 선장은 시간을 쟀다. 그때 내가 탄 배 바로 옆에서 대왕고래의 숨구멍이 나타났다. 물기둥을 어뢰처럼 발사한 대왕고래는 거대한 등을 보였다. 매끈한 곡선을 그리며 다시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대왕고래의 등줄기는 길고 길었다. 분명히 돌고래는 바닷속으로 사라졌는데, 돌고래의 등은 아직도 포물선을 그리며 잠기는 중이었다. 과연, 세계에서 가장 큰 동물의 웅장한 자태였다.

미리사의 인기 비결 중 하나는 대왕고래다. 스리랑카 남부 해안에서 길이 1~2m, 몸무게 100kg 이상의 바다거북을 볼 수 있는 곳은 많다. 하지만 바다거북과 대왕고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은 미리사밖에 없다. 그리고 야생 코끼리와 대왕고래를 하루에 다 볼 수 있는 곳은 아마 스리랑카뿐이지 않을까. '와일드 스리랑카', 내가 스리랑카를 이렇게 부르는 이유다.     

선장은 또 시간을 쟀다. 하지만 대왕고래가 어디에서 나타날지는 알 수 없는 일, 운에 맡길 뿐이었다. 대왕고래의 심장은 소형 자동차만큼 크고, 심장 소리는 3km 밖에서도 들린다고 한다. 대왕고래의 꼬리라도 보면, 그거대로 좋았다. 대왕고래의 꼬리는 더블 침대처럼 넓고 장갑차처럼 단단해 보였다.     

“자, 여러분. 고래 잘 보셨죠? 오늘은 운이 좋네요. 고래를 가깝게 볼 수 있었어요. 즐거운 투어 됐나요? 여러분과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항구로 돌아갑니다. 맛있는 과일 먹으면서 미리사의 바다를 감상하세요. 감사합니다.”     

선장의 방송이 끝나자 달콤한 수박 파티가 시작됐다. 멀미 때문에 속이 안 좋았지만, 수분과 당분이 많은 수박은 좋은 영양제였다. 아까 난갑을 붙잡고 토하던 여행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대왕고래도 못 본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엔 나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고 멀미에 지친 여행자들은 게눈 감추듯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우리를 데리러 오겠다던 뚝뚝은 오지 않았다. 나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 화가 났다. 건성으로 보이던 그의 태도가 아침부터 거슬렸다. 숙소에 연락해 따지고 싶었다. 지쳐 보이는 R 때문에 더 예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R은 불편한 기색도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멀지 않으면, 그냥 걸어가자.”     

R의 말대로 걸었다. 걸으면서 작은 마을을 지났다. 그때 골목을 쓸던 할머니가 대뜸 손을 내밀며 구걸했다. 나는 그 모습이 어이없으면서도 웃겼다. 행색이 초라하지도 않은데, 뻔뻔하게 돈을 달라고 하다니. 아마 할머니의 짓궂은 취미이자 부업쯤이지 않을까. 그 마을과 작은 골목은 대왕고래만큼 재미있었다. 왜냐하면 여행자는 주로 여행자 시설이 밀집된 곳에 머물며, 그 주변밖에 못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로컬 문화로 착각한다. 진정한 로컬 문화는 결코 여행자 곁에서 찾을 수 없다. 그건 이렇게 뚝 떨어져서 길을 잃어야 만나게 된다.     

나는 나를 바람 맞힌 뚝뚝 기사 때문에, 그리고 어느 순간에도 태연하고 씩씩한 R 덕분에 즐거운 산책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화난 마음도 스르르 풀렸다.     

문득 선배 작가의 말이 떠올랐다. ‘좋은 것을 보면 좋아지는 마음.’ 대왕고래를 보고도 이렇게 속 좁게 살면 무엇하나. 세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와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내 심성의 차이는 우주와 티끌 차이 같다.     

숙소 주인아저씨는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며, 대왕고래를 봤는지 물었다. 나는 아주 운이 좋았다고, 대왕고래를 바로 앞에서 봤다고, 어제 투어를 예약해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땡땡이친 뚝뚝 기사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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