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사에서 오래 지내는 동안 옆 동네인 웰리가마(Weligama), 그리고 캄부루가무와(Kamburugamuwa)까지 생활 반경을 넓혔다. 뚜벅이 여행이라면 1,000루피 정도 요금을 내야 하는 먼 곳이지만, 나는 뚝뚝을 직접 운전해 쉽게 월담했다. 한 날은 B를 위해 남성 전용 미용실을 찾아 웰리가마에 갔다. 웰리가마는 미리사보다 몇 십배 큰 바다와 상권을 가지고 있는 작은 도심이었다.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도 미리사보다 훨씬 크고 차편도 많았다. 우리는 뚝뚝을 타고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여행자에게 한정된 세계 그 이상을 탐험했다.
탐험의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오늘은 웰리가마와 아항가마(Ahangama)를 지나 코깔라(Koggala)까지 길을 나섰다. 코깔라는 아항가마 바로 옆에서 코깔라 호수를 끼고 있는 작은 행정 구역인데, 이 둘을 통틀어 아항가마로 여긴다. 이곳까지 뚝뚝을 달린 이유는 스틸트피싱(Stilt Fishing)이었다. 스틸트피싱은 길고 튼튼한 나무를 가까운 바다에 깊숙하게 심어 두고, 그 외나무 기둥에 매달려 고기를 낚는 스리랑카 남부 해안의 전통적인 낚시법이다.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외나무 기둥에서 중심을 잡으며 거친 파도에 맞서야 하는 고급 기술이며 스리랑카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짐작게하는 산문화이자 유산이기도 하다.
스리랑칸 항공 기내에서 스리랑카 관광의 대표 이미지로 소개되는가 하면, 스리랑카 전역에서 이 독특한 낚시법을 볼거리로 소개하고 있었다. 그만큼 내 기대도 컸다. 그런데 낚시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일몰 때 어부들이 조업에 나선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장 조사에 나섰다. 맨 도착한 곳에서는 기둥만 듬성듬성 박혀있을 뿐 어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 포인트로 이동했다. 미리 여러 포이트를 점찍어두고, 일몰 때 뚝뚝으로 계속 살피다 보면 해 질 녘 노을을 배경으로 스틸트피싱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또한 이동 수단과 요금에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아항가마를 지나 코깔라 해변에 도착했을 때 열 명 정도 되는 어부들이 스틸트피싱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액셀을 당겨 해안가 목 좋은 곳에 뚝뚝을 세웠다. 그때 승합차 한 대가 들어오더니 중국인 관광객이 우르르 내렸다. 먼저 내린 가이드는 어부들의 대표로 보이는 사람에게 몇 가지 당부를 전했다. 어부들은 개학 날 교실을 청소하는 고등학생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때 가이드가 사진을 찍으려는 우리를 발견하고 말했다.
"어이, 이봐. 사진 찍으려면 돈을 내야 해."
그럼 그렇지. 이 모든 것은 상품이었다. 나는 재빨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머릿속으로 셈을 마쳤다. 단체 관광객이 이 모습을 실증 내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을 터. 빨리 흥정해야 한다.
"사진 찍는 데 얼만데요?"
"몇 명이야? 한 사람에 1,500루피. 세 명이면 4,500루피인데 특별히 4,000루피로 해줄게."
"세 명이라고 한 적 없는데요. 사진은 한 명만 찍을 거예요. 나머지는 눈으로만 볼게요. 그런데 1,500루피는 너무 비싸요. 1,000루피로 해주세요."
사실 1,000루피도 말도 안 되게 비쌌지만, 이번 흥정에 불리한 쪽은 나였다. 계속 흥정을 붙일수록 사진 찍을 시간은 줄어든다. 그렇다고 열 명의 어부를 다시 섭외하는 데는 더 큰돈이 들 테니, 그의 욕심에 흔쾌히 부응했다. 말 몇 마디로 1,000루피를 벌게 된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불쌍한 표정도 연기했다.
"좋아. 사진을 찍는 건 한 명이야. 얼른 나와서 찍어. 10분이야."
B가 큰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눌렀다. 얼마 뒤 단체 관광객을 승합차를 타고 사라졌다. 어부들도 지루햐 낚시 시늉을 마치고 갸냘픈 낚싯대를 챙겨 외기둥에서 내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망태기가 들려있지도 않았다. 어쩐지 조금 씁쓸하게 성공한 스틸트피싱 구경이었다.
예상외로 일이 잘 풀리자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고깔라 호숫가에 있는 마틴 위크라마싱헤 민속 박물관(Martin Wickramasinghe Folk Museum)에 들렀다. 박물관은 높은 벽, 획일적인 파티션으로 구분된 현대적이고 인위적인 모습이 아니라 숲 속에 은신한 농부의 작은 집처럼 편안하고 활기찼다.
이 박물관은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문인, 마틴 위크라마싱헤의 집터를 복원한 것이다. 그는 1980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1976년 타계할 때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그의 집터를 민속 박물관으로 꾸민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대표작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싱할라어로 쓴 부츠사라나(Buthsarana)는 '생명' 또는 '삶'을 의미하며 스리랑카의 농촌 생활을 그린 소설이다. 감페랄리야(Gamperaliya)는 '마을 이야기'로 의역할 수 있는데, 급변하는 농촌 사회 마을에 관한 소설이다. 또 칼리유가(Kaliyugaya)는 '현재의 시대'라는 뜻으로, 인간의 존재와 사회적 변화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데왈라와라(Dewalawara)는 '신성한 곳', 즉 불교 철학과 스리랑카의 전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처럼 마틴 위크라마싱헤는 스리랑카 민초의 삶, 그리고 그들의 생활 양식과 문화를 소설로 남겼다. 그는 펜의 힘을 통해 정치적 문제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농촌과 서민을 대변했다. 또 스리랑카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틴 위크라마싱헤는 대부분의 작품을 싱할라어로 썼다. 스리랑카의 우수한 문화와 불교 철학을 국제적으로 알릴 때만 영어를 사용했다. 이제 사람들은 마틴 위크라마싱헤를 스리랑카의 국민 예술가, 싱할라 문학의 아버지로 부른다. 이곳은 그의 작품 세계를 기록한 공간이자, 민속 박물관으로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곳이었다.
한 때는 민속 박물관을 시시하게 여겼다. 금이 간 화살촉, 오래된 토기 등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냥 도구, 생활 도구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면 지역과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바로 그 조금의 차이에 얼마나 많은 역사가 담겼는지 알게 된 건, 부끄럽지만 최근의 일이다. 내가 지루하게 여겼던 곳들, 옛것을 모아 둔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R을 쫓아다니다 보니, 내 견문도 이제 막 눈을 뜬 아기처럼 한 꺼풀 밝아졌다.
문득 낚시가 아니라 낚시를 연출해서 돈을 버는 어부가 떠올랐다. 혹자들은 전통이 변질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이유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다. 돈을 벌어야 가족을 건사하고 삶을 영위한다. 그 속에 행복도 있다. 낚시보다 더 쉽고 큰 돈벌이를 할 수 있다면, 그래서 가족과 더 행복할 수 있다면, 나도 낚시가 아니라 낚시를 흉내 내는 어부가 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전통을 지키는 건 누구의 몫일까. 마틴 위크라마싱헤의 작품 속에는 답이 있을까. 적어도 속이 비칠 정도로 해진 사롱을 두른 늙은 어부나 그에게 일감을 주는 영세한 여행사를 탓할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