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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타이밍'이라면

by 리틀 골드문트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TV에서, 책에서, 잡지에서 어디론가 향했던 버스 안 라디오에서 여러 번 들으며 마치 오래된 격언처럼 느껴지는 말이 몇 개 있다.

우연히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한 게시물로 알게 된 내 또래의 여자가 몇 년 전 서른 살 즈음에 출간한 에세이를 읽다가 문득 '타이밍'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러다 자동적으로 '인생은 타이밍이다'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갑자기 누가 처음 한 말일지 궁금해서 요즘 카톡보다도 더 많이 들어가는 ChatGPT에게 이 말을 누가 처음 했는지 물어봤다. ChatGPT가 말하길 특정인으로부터 시작했다기보다는 여러 분야에서 자주 인용되었다고 한다. 유명인으로는 일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이자 감독인 노무라 가츠야, 워렌 버핏, 스티브 잡스가 언급했단다. 유명인은 아니지만 나도 이 말을 써본 적이 있다. 회사 동료들이나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 스스로 성숙한 어른 흉내를 내고 싶었던 어느 순간에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인생은 타이밍이다'라는 말이 진리라면, 지금까지의 내 인생은 망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맨 처음 타이밍을 고민했던 나이는 아마 6, 7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에 지하철 역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지하철 역 사이에 오르막길 차도가 있었다. 지하철 역 주변이고 먹자골목도 있어서 유동 인구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차도에는 신호등이 없었다. (신호등이 생긴 건 아마 10년 뒤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그 도로를 건너기 위해, 사람들은 알아서 차가 안 오는 때에 후다닥 움직여야 했다. 지하철 역으로 가려면 그 도로를 꼭 건너야 했기에 엄마는 나와 나보다 세 살 많은 오빠의 두 손을 꼭 잡고 신중하게 차도를 건넜다. 건너갈 타이밍을 재면서 오가는 차를 예의주시하는 순간에도 엄마는 혹여나 내가 혼자 걸어갈까 봐 나를 꼭 붙들어 매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주의를 주면 줄수록 나는 점차 그 도로를 혼자 건너보고 싶었다. 엄마가 차를 살피고 우리를 이끌고 도로를 건너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왠지 나 혼자 건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 도로 앞에만 오면 바짝 긴장하는 엄마가 과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나는 생각을 실행에 옮기고 말았다. 엄마가 잠깐 내 손을 잡고 있지 않은 틈을 타 내가 그 도로로 발을 옮긴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타이밍 계산은 허술했고 순식간에 차가 빵빵 거리며 내 앞에 멈춰 섰다. 그 모든 게 2초 안에 벌어졌던 것 같다. 엄마는 서둘러 나를 쫓아와 내 팔을 잡고 차를 향해 머리를 연신 숙인 후 도로를 건넜다. 엄마도 너무 놀랬던 모양인지, 왜 혼자 차도에 뛰어들었냐며 나를 야단치진 않았다. 나는 그 뒤로 한동안 도로를 혼자 건너지 못했다.


타이밍에 실패한다는 것이, 적절한 찰나를 잡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애초에 그 찰나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느린 경우를 뜻하기도 한다.


온갖 바쁜 척 다 하면서 헉헉거리며 난리를 피워도, 결국 해내는 수준은 남들과 비슷하거나 좀 떨어지는 사람이 나란 사람이다.

나는 학습 능력이 낮은 편이다. 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IQ 검사를 한 적이 있는데, 수치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대학교 졸업까지 16년 공부하면서 깨달은 건,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노력해야 비로소 원하는 수준에 도달은 못해도 가까워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6년 내내 그렇게 노력했을 리가 없다. 고등학생 시절, 삶이 공허하고 삶의 의지가 무기력했던 때에는 공부에 손을 놓고 한동안 바닥을 전전했다. 그 후 공부 외엔 모든 걸 다 포기하고 해내지 못하면 죽겠다는 결심으로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던 시기를 겪고 나서야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연애의 타이밍은 또 어떤가. 대학생 때 한창 꾸미고 연애도 해볼 그 황금 같은 시기에 나는 자존감에 바닥을 치며 허우적대고 있었다. 괜히 인문학을 복수전공해 스스로 팔자를 꼬아버려서 공부는 공부대로 하지만 학점은 평균 또는 평균 이하를 맴돌았다. 시급 3,800원 알바 생활에 친구들과의 외출과 외식은 부담스러웠다. 차비를 아껴보겠다고 한 시간 정도면 웬만하면 걸었고 교양수업 과제하러 과천 국현대미술관에 갔다가 돈이 없어 반나절 굶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 시절 제일 싫었던 건 내 외모였다. 나는 다이어트와 폭식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나조차 내 얼굴이 꼴보기 싫어서 스스로를 집에 갇혀 있기도 했다. 미적 감각이 없어서 화장을 하면 촌스럽고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놀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불편만 마음만 붙잡고 어두운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다 교내 도서관 알바를 하다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호감 가는 학우에게 고백을 했던 적도 있다. 잠깐 밖으로 불러냈더니, 그 학우는 본인을 혼내려는 줄 알았다고 했다고 한다. 그 시절 나는 왜 그리 엉망이었을까.


회사생활에 중요한 타이밍은 뭘까? 바로 퇴사각이다. 번듯한 중견기업이나 대기업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퇴사할 고민이 적겠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열정페이로 말단 직원들을 후려치기 하던 중소기업에서 일하다 보면 퇴사 타이밍을 재는 일만큼 중요한 게 없다. 개인에게 배정되는 업무가 너무나 많아지고 내가 안 하면 결국 바로 옆에 앉은 똑같이 업무가 많은 동료의 일만 늘어나는 꼴이기에 상사에게 덤벼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대안조차 없는 이 쓰레기 같은 회사 상황에 욕사발을 하며 한숨으로 밤샘 근무를 해야 했던 그 시절. 일은 많고 수익은 형편없는 거지 같은 프로젝트가 끝나면 절호의 회사 탈출 타이밍이 찾아온다. "00씨, 사실 나 할말 있어" 동료들은 이런 메신저로 당신들의 퇴사를 고했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떠나가는 그 순간에도 나는 번번이 그 황금 같은 빤스런의 기회를 떠나보냈다. 미련한 책임감을 신성한 사명감으로 착각한 탓이었다. 여기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어딜 가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요상한 자학정신도 함께했다. 결국, 퇴사한 사람들의 업무까지 나는 떠안아야 했고, 그 시간들은 더 큰 재앙의 시간으로 나를 집어 삼켜, 결국 어느 순간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첫 회사를 퇴사하고 말았다. 쥐꼬리만큼 받은 퇴직금은 망가진 내 몸과 마음을 고치고자 다녔던 한의원과 요가수업 비용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그 뒤로도 3개의 회사를 더 다녔지만, 중소기업이든 대기업이든 내가 버텨낼 수 있는 시간은 2년과 3년 그 사이 어디쯤이었다. 누가 내 이력서를 보면 얜 좀 또라이가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 같다. 전문대학을 졸업하듯 4개의 회사들을 2년 언저리만큼 다녔다. 억울한 건 정말 각 회사에 미친 듯이 최선을 다했고, 더 이상 짜낼 에너지도 없을 때 퇴사했다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과정을 2년 N개월씩 4번을 반복했다. 내가 회사 사장이어도 나 같은 이력서는 좀 별로다. 마지막 회사를 나올 때, 나의 커리어가 망가졌음을 인정하면서 후회도 미련도 없이 직장생활 셔터를 내렸다.


가끔 타이밍을 귀신같이 잘 잡아낸 누군가의 스토리를 들으면 질투가 폭발한다. SNS에 올려놓은 본인의 성공스토리를 볼 때면, '나도 저렇게 해봐야지' 라는 생각보다 질투가 난다. SNS 계정이 화제가 되고 그걸 발판 삼아 강의를 하고, 책을 내고, 유명인과 컬래버레이션을 하며 결국 이렇게 돈을 많이 벌게 됐다는 거룩한 스토리는 늘 남들보다 최선을 다해 두 발작씩 늦는 내겐 배 아픈 얘기이자 자괴감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는 촉매제일 뿐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명언이 또 저절로 떠오른다. 가뭄 같은 내 인생에 물이 들어올 때는 있나?


아. 타이밍에 다다를 부지런함도, 타이밍을 볼 수 있는 똑똑함도, 타이밍과 상관없이 내지를 배짱도 없는 나란 인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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