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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건조함이 미친 듯이 가렵다

by 리틀 골드문트

늦은 밤이지만 잠이 막 쏟아지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불을 끄고 누워 잠들려는 노력도 귀찮은 기분이 들 때면 익숙하게 인스타그램 릴스를 들여다본다. 며칠 전 새로 만든 계정으로 들어가니 아직 알고리즘이 나를 파악하기 전이라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의 콘텐츠가 무작위로 떴다.

낯익은 한국의 연예인과 인플루언서가 유명한 밈을 따라 하는 영상이라든지, 꿀템이라고 물건을 추천하거나 '이렇게 만들어 먹어보세요', '이렇게 먹었더니 살이 빠졌습니다'를 떠들어대는 영상에서 벗어나, 이미 유명한 사람일지라도, 적어도 내 눈엔 새로운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신선한 콘텐츠를 보는 재미는 몇 배나 크다. '이걸 위해서라도 한 번씩 새로운 계정을 만들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콘텐츠를 넘기다가 어느 한 영상에서 시선이 멈췄다. 한국인 여성이 해외의 어느 다이닝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이 담긴 셀프 영상이었다. 앳된 얼굴로 보아 워킹홀리데이 중인 듯했다. 카페에 한 여성이 와서 아빠에게 가져다 줄 돼지고기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돼지고기는 없고 소고기 버거만 있다고 응대하던 이 한국인 여성은, 이내 딸의 얼굴에서 카페 단골손님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그가 평소 주문하던 소고기 버거를 준비해준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카페에서의 일상을 보여주는 짧은 영상이었다.


귀여운 옆모습에, 본인의 매력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볼드한 목걸이와 피어싱, 그리고 도레미파'솔'의 기분 좋은 목소리 톤, 정확한 정보 전달과 그 사이에 적절히 섞인 친절한 맞장구, 유창한 영어실력까지- 내가 카페 사장이라면 탐낼 만한 유능하고도 싱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 뒤에 보이는 카페 창가 너머의 눈부신 햇살과 평화로운 어느 동네의 풍경 한 조각이 이 영상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아, 진짜 일상의 어느 한 순간이, 감탄을 자아내던 영화 속 풍경보다도 아름다울 수 있다니.


반복해서 돌아가는 이 1분짜리 영상을 넋 놓고 보다가, 호기심이 생겨 계정에 들어가 같은 각도의 다른 영상들도 하나씩 둘러봤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머리 하셨어요?"

"맞아, 잘랐어!"

"어쩐지! 시원해 보여요."

"너무 짧은 것 같아."

"아뇨, 잘 어울리는데요!"

"꿀 넣은 녹차랑..."

"치즈 안 들어간 바게트 맞죠?"

"응 맞아. 그리고 마요네즈도 적게 넣어줘~"


인사와 주문만 주고받고 끝낼 수 있도 있는 대화를 몽글몽글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그녀는, 많아 봐야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에 비해 너무 능숙하다. 나는 저 나이 때 사람들을 향해 방어막을 두르고 스스로를 좀먹고 있었는데, 외모는 물론이고 태도까지 사랑스럽다니, 너무 사기캐잖아.


그러다가, 저 공간에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나 짧은 만남엔 비교적 능숙하지만 규칙적인 관계에는 젬병인 내가, 어쩌면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미국 한달살이를 할때 매일같이 들렀던 여러 카페의 아르바이트생들은 한결같이 표정이 밝고 친절했다. 좋은 서비스가 팁과 직결되다보니 태도가 좋을 수밖에 없는 것도 있겠지만, 그들이 뿜어대는 사랑스러운 활기는 단순히 팁을 위한 친절이라고 치부하기엔 좀 달랐다. 뭘 마실지 잠깐 고민하다가 주문을 하면, "나도 그 메뉴 좋아해, 좋은 선택이야"라고 칭찬을 해준다든지, 매장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싸갖고 가겠다고 하면, "나도 그거 양이 많아서 한 번에 다 못 먹어. 포장해 줄게"라고 말해주는 스윗함 말이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일하면 '끼 부린다'며 사람들이 싫어할라나?


나 역시 한때는 이런 사소한 안부와 관심들이 쓸데없는 거라고 치부하며 살았다. 그런데 요즘 나는 내 삶의 건조함이 미친 듯이 가렵다. 오랜 친구들과의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려워서 벅벅, 시댁 어른과의 모임이 있었던 날 밤, 잠 못 이루고 벅벅, 설에 만난 친오빠의 일 얘기에 벅벅, 현실을 직시하라는 남편의 말에 벅벅. 빨간 생채기를 달고 살다 보니, 이곳에서 8,500km 떨어진 호주 멜버른의 어느 다이닝 카페에서 일하는 사랑스러운 여성의 아르바이트 영상을 넋 놓고 보다 눈물이 또르르 났었나 보다.


오랜만에 신촌에 갔다. 체감으로는 백만 년 만에 가는 신촌이기에 내 기억은 대학생 때에 머물러있다. 아직 여드름도 안 없어진 붉으스레한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걷자니, 나 자신이 고대 화석이 된 것마냥 느껴져서 민망했다. 친구들과 으레 만났던 신촌역 2번 출구 앞에 올리브영이 보였다. 원래 저 자리는 투썸플레이스였다. 불현듯,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도 기억이 안나는 이대생이었던 어느 여자애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저기 보여? 나는 투썸플레이스에서 저 자리를 제일 좋아해"라고 했던. 거봐, 결국 사소한 얘기만 기억에 남는다니까. 얼굴도, 이름도 사라진 그 여자애의 짧은 머리만 간신히 기억해 냈다가,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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