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파 이야기
거리를 걷다 보면, 내 마음을 사로잡는 가게 이름들이 있다. 90년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빈티지한 외관도 아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도 아니지만, 그저 이름 하나만으로 마음을 사로잡는 그런 가게들. 내게는 '순정'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나는 이 단어가 지닌 본질의 의미도 좋지만, 이 단어를 발음할 때의 입모양과 소리까지도 좋아한다.
그래서 오래전에 화장품 브랜드 에뛰드가 '순정'이라는 기초라인을 론칭했을 때,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로션과 스킨세트를 구입한 적이 있다. 어느 카테고리를 막론하고 순정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면 외면할 수가 없다. 군더더기 없이 기본에 충실하다는 거니까. '저자극', '약산성'을 강조하던 그 기초라인은 당연히 안 좋을 리 없었지만 눈에 띄는 효과가 있을 리도 없었다. 나는 그 담백함이 오히려 좋았다. 적당히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태도를 가진 사람과의 첫 만남이 부담을 주지 않는 것처럼, 기본에 충실한 물건은 첫 사용도 스스럼이 없고 언제 써도 부담이 없으니 말이다.
이런 내 성향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육십이 넘은 우리 엄마는 화장품 브랜드 미샤를 십수 년째 쓰고 있다. 어느 날 내가 "엄마도 다른 아줌마들처럼 에스티로더 갈색병이나, 후 같이 좋다는 화장품 좀 써봐" 하니, "얘, 나도 미샤에서 고가 라인 사서 팍팍 쓰는 거야. 광고 많이 한 비싼 화장품 사서 아껴 바르는 것보다 이게 훨씬 좋은 거야"라고 하셨다.
그 엄마의 그 딸이라, 나는 서른 살이 훌쩍 넘어서도 여전히 이십 대부터 쓰던 이니스프리가 좋고, 평소엔 무향, 무자극, 보습에 충실한 일리윤 아토로션으로 얼굴과 전신에 바르고 끝이다. 이러다 보니, 고등학생 때부터 크리니크, 비오템 등 그 시절 유명한 해외 화장품들을 썼던 내 친구들은 "넌 펌핑 한 번으로 모든 걸 끝내냐"라고 놀려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의 소리를 내뱉는다. '그래도 난 비싼 화장품이나 울쎄라니, 써마지 같은 시술 한 번 안 해도 동안 소리 듣는다고'
물론, 언젠가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 자던 날 밤에 썼던 비싼 화장품들의 위력은, 다음날 아침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비싼 것에는 이유가 있긴 하다.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정'은 매번 새로운 도전을 갈구하면서도 일정 부분 안정감을 유지하고 싶은 내게 정서적인 지지대 같은 존재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순정파'로 살아왔다.
그리고 이 순정은 소비의 영역을 넘어 감정 표현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체벌이 흔했던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맞아도 아프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보다 권력자가 휘두르는 이해할 수 없는 폭력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었다.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체벌을 해. 하지만 넌 나를 아프게 할 수 없어'라는 무언의 반항.
귀를 비틀고 꼬집는 선생님의 체벌 앞에서도 나는 묵묵히 참았다. 반면에 내 친구는 조금만 귀를 잡아당겨도 아프다고 소리를 빽 질러 선생님의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어냈다.
그 친구는 지금도 사소한 일에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럼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다가, 결국은 내 이야기는 거의 하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난다. 그래서 매번 기가 빨린 채 집에 돌아가는 나는, 다음 약속이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모임에 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내 근황은 없고, 타인의 근황만이 가득한 자리는 얄팍한 우정의 시소에서 저울질을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저울질의 끝에서 나는 대부분 가는 것을 선택했다. 기본으로 채워진 내 세계에도 가끔은 양념 같은 시간도 필요하므로.
순정은 순정으로서 대해주오
그러나 순정파로서, 순정을 요란하게 다루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좀 불편해진다. 가령 '맛집'을 거론하며 순정의 대체어들을 수식어로 쓰며 요란하게 포장하는 사람들 말이다.
어제 청소를 하다가 틀어놓은 유튜브가 자연스럽게 다음 영상으로 넘어갔다. 재생된 건 성시경의 '먹을 텐데' 콘텐츠였다. 청소기 너머로 그가 으레 하는, '나는 돈을 받고 맛집을 소개하지 않으며, 내가 정말 좋아하는 가게를 소개하는 겁니다'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청소를 끝내고 무심히 영상을 보다 습관적으로 댓글을 살펴봤다. '맛있어 보인다', '추천해 줘서 감사하다'는 호평일색의 댓글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댓글 하나가 보였다. 대충 내용은 이랬다.
'추천한 곳 여러 군데 가봤지만, 소문나서 오래 기다려 먹은 음식 맛은 동네에 있는 흔한 식당 수준이었습니다. 영상에서 매번 맛있다고 감탄하지만 막상 가보면 평범한 곳이네요.'
예전에 회사를 다닐 때 내가 존경하던 본부장님이 계셨다. 미식가로도 유명했고, 들리는 이야기로는 집안이 꽤나 유복해서 소위 말하는 '강남 부자'라고 했다. 언젠가 점심을 사주신다고 해서, 팀원들과 함께 동행한 적이 있다. 본부장님과 식사할 때면 늘, 본인이 아끼는 맛집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하셨다.
그날 본부장님이 직접 본인의 차로 우리를 데려간 곳은, 회사에서 거리가 좀 되는 어느 골목의 국숫집이었다. 그의 주문으로 정갈하게 차려진 고기전과 국수가 나왔다. 이곳이 본인의 오래된 맛집이라고 말씀하시자 옆에 앉은 팀장님과 팀원들이 맛있다며 연신 본부장님의 안목을 칭찬하며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때 적당히 사회생활을 했지만, 그 소박한 국수와 고기전의 맛과 '평생 맛집'이라는 표현과, 연신 감탄하는 그 요란한 추임새 사이의 괴리감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 부조화가 내 마음에 걸렸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며 순정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 순정은 튜닝의 결과물이 아니라, 본디 순정인 채로 있어야 하는 무엇이니까.
순정이 순정으로서 대해져서, 오래도록 순정을 즐기고 싶은 순정파의 욕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