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뒷북쳤다
쿠팡플레이에서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봤다. 2023년 1월 개봉작이니, 벌써 2년이 지난 작품이다. 개봉하자마자 영화관으로 달려가거나, 유료 결제를 불사하서라도 꼭 보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꼭 봐야지' 생각만 하다가 잊히는 영화가 있다. 나에게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딱 후자였던 것이다.
아주 어릴 적에 본 만화라 기억에 남는 이름이라곤 강백호와 채치수뿐이었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등장할 때마다 반가움과 벅참이 동시에 밀려왔다.
영화는 북산고 농구부의 포인트가드 송태섭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드리블이 탁월한 그는, 팀에서 공을 운반하고 패스를 조율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는 농구로 촉망받는 선수였던 형이 있었고, 형을 떠나보낸 후에는 형의 빈자리와 농구 사이에서 방황의 시간을 보내며, 북산고 농구부의 일원으로 성장해간다.
영화는 송태섭의 성장 서사와 고교 농구 최강팀 산왕공고과의 경기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나는 송태섭에게 감정이입을 심하게 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뒤, 남은 감정을 잠시 추스르던 내게 문득 스치고 지나간 감정 하나가 있었다. 바로 '분하다'는 감정이었다.
분하다, 그 다층적인 감정
분한 감정은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다. 비슷한 단어로 떠오르는 '분노'와는 결이 다르다. 분노가 화(火)의 농도를 90%쯤 머금은 감정이라면, 분함은 그보다는 훨씬 낮은 50% 정도의 농도를 지닌 감정이다. 게다가 분함에는 단순히 화뿐 아니라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다. 그래서 '분노' 하면 선명한 빨간색이 떠오른다면, '분함'은 다채로운 감정이 섞여 어둡게 가라앉은 진회색이 떠오른다.
분한 감정의 밑바탕엔 본인의 정성과 진심이 깔려있다. 분한 감정은 대게 열심히 준비했거나 간절히 바랐던 일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생각보다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을 때, 필기시험은 잘 봤지만 면접에서 탈락했을 때, 운동 경기에서 마지막에 역전당했을 때처럼 말이다. 즉, 내가 기대한 것보다 낮은 수준의, 합당하지 않은 대우를 경험했을 때 우리는 분한 감정을 느낀다.
그래서 이 감정에는 화 외에도 속상함, 수치심, 실망감, 억울함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예상과 다른 부당한 결과는 상대방에 대한 분노뿐만 아니라 이 상황에 대한 무력감, 그 속에서 비롯되는 속상함, 스스로에 대한 실망까지 포함되어 있다.
송태섭의 성장 과정에는 분함이 점철돼 있다. 농구 잘하는 친형이 본인의 농구 연습 상대가 되어주면서도 적당히 져주기보단 절대로 곁을 내어 주지 않았던 기억, 가족의 부재를 겨우 버티고 있을 뿐이었는데 건방져 보인다는 이유로 집단 구타를 받았던 기억,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코트 위에 서야 했던 기억, 이를 갈고 준비한 산왕공고와의 시합에서 좀처럼 좁혀지지 않은 점수차이를 극복해야 했던 기억 말이다.
그래서, 분함은 열심히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
그래서 나는 '분하다'는 감정이야말로 삶의 한가운데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단순한 억울함이나 분노를 넘어서 (1)내가 과거에 얼마나 애썼는지 (2)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진심으로 살고 있는지 (3)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투지를 증명해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송태섭이 그토록 분함의 이면에는 농구를 향한 진심과 그 진심에 상응하는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교 농구의 최강팀인 산왕공고를 이겨보겠다는 간절한 의지가 있었다.
비록 영화의 서사는 송태섭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채치수, 정대만, 서태웅, 강백호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이 분함을 안고 있었다. 이 분한 감정들이 모여, 산왕공고와의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송태섭은 팀의 주장이 된다.
내가 분했던 기억은
내가 분함을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는 건, 초등학생 5학년 즈음이었을 때다. 그 시절 나는 이런 저런 대회에 나가서 상 받는 것을 좋아했다. 글쓰기, 그림 그리기, 자기주장대회 같은. 수학이나 과학경진대회는 영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 엄마와 장보러 나갈 때면 길거리에서 노래를 불러댔던 나는, 뭔가를 표현하는 것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상장을 받을 때 우수상 이상이면 문화상품권 1만 원 이상의 부상이 주어졌고, 그걸 모으는 재미도 쏠쏠했다. 당시 나는 진짜 금 목걸이를 갖고 싶어 했는데, 엄마에게 "내가 문화상품권을 많이 모으면 그만큼의 값으로 된 목걸이를 사달라"고 제안했다. 엄마는 13만 원이면 14k 목걸이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 목표는 1년 동안 문상 13만 원을 모으는 것이었다.
나는 웬만한 대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고, 열심히도 상장과 문화상품권을 받았다. 대회는 참여하고자 하는 학생들의 신청을 받아 진행되었기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그날도 어느 대회에 참여하겠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선생님이 수업이 끝나고 나를 조용히 부르시더니, 이번 대회는 참여하지 않으면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지난번에도 상을 받았으니 이번에는 다른 친구를 위해서 참여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한 학생의 성취도 중요하지만, 40명에 가까운 학급 아이들을 고루 살펴야 했던 선생님의 마음을 이해한 나는 어린 나이에도 알겠다고 의젓하게 대답했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속이 상했다. 내가 다른 아이들의 기회를 빼앗은 것도 아니고, 정정당당하게 잘해서 받은 성취인데 왜 대회 포기를 강요받아야 하는 건지 억울했다. 대회에서 공정하게 승부를 겨루면 되는 것이 아닌가?
집에 도착해 엄마에게 이 얘기를 전달하다 감정이 복받쳐 끝내 울고 말았다. 그때의 일은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이번엔 도전하지 못하지만, 다음에 대회가 열리면 그게 무엇이더라도, 겁이 나더라도 도전하자고 마음 먹었다.
20년도 더 된 오래전 이야기라 그 이후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클리어 파일에 꽂혀 있는 수십 개의 상장들과 조각난 기억들을 더듬어 보면, 이후 나는 학교 대표로도 여러 대회에 나가서 교장 선생님과 악수하며 상장을 받은 뿌듯한 순간도 경험했고, 목걸이를 살 정도의 문화상품권도 모았으며, 이왕 사주는 거 좋은 걸로 사주자는 아빠의 생각에 내가 모았던 값보다 더 비싼 목걸이를 선물 받아 지금도 종종 목에 걸고 있다는 해피엔딩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잘 살아냈다. 원하는 것이 있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분하다'는 감정도 느껴봤으니 말이다. 그 감정이야말로 내가 그 시간을 진짜로 살아냈다는 증거일 것이다.
다시 분해보고 싶다는 생각
작년 말부터 내 인생 처음으로 잔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번 크고 작은 일에 쫓기며 살다가, 어느 순간에는 옷을 입고 나가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심신이 지쳐있었다. 지금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볕을 즐기며 산책하기도 하고, 삼시 세 끼를 제대로 챙겨 먹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쫓기듯 달려온 삶을 청산하고 천천히 걷는 지금의 일상은, 내 몸과 마음을 살뜰히 챙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지만, 태생부터 느긋한 사람을 흉내 낼 수 없듯이, 이 감사한 시간도 내 손으로 서서히 끝내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 물론 예전처럼 소진되는 삶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던 찰나에 우연히 발견한, 반가운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보며, '아. 다시 분해보고 싶네?' 하는 기질이 떠오른 것이다. 송태섭 같은, 초등학생 5학년 시절의 나처럼.
평지를 따라 걷는 벚꽃놀이보다, 숨이 차오르는 산길을 오기로 단박에 오르는 게 끌리는 나는, 어쩔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