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의 늪
나는 이따금씩 불면증을 겪는다.
회사에 다닐 때, 하루에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날이면 다음날 집에 돌아와 기절하듯 잠에 빠지고 다음날 다시 불면을 겪었다. 예전엔 불면의 이유가 막연히 회사 스트레스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둔 뒤에도 불면은 여전히 나를 찾아왔다.
잠을 이루기 어려운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빈번하고도 분명한 전조 하나가 있다. 불현듯 누군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말 '따위를' 할 수가 있지?'
이미 곱씹어 본 전력이 있는 그 말을 다시 곱씹다 보면, 잘게 짓이겨진 말 조각들은 흡수하기에 좋은 형태로 변이 되어 내 몸의 장기에 이리저리 퍼져 자리를 잡고 스며들었다.
그러면 남편이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밤 중, 내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화가 났다가, 말로든 뭐로든 되갚아줄 복수심에 불타올랐다가, 다음에 만나면 되받아칠 말과 행동을 생각해 내고 다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세시를 향해있었다.
회사에 다닐 때는 협업해야 할 업체도 많고, 조율해야 할 갈등도 많았기에 이 불편의 늪은 지금보다 훨씬 거대했다. 처음엔 이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가, 빠지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심리의 메커니즘을 깨달았다. 차라리 이 마음의 근원이 무엇인지 글을 쓰거나, 다른 해야 할 일을 하며 자연스럽게 늪에서 떨어져 가는 방법을 택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침대에서 조심히 나와 거실을 건너 작업실 방의 불을 켰다. 어차피 수면은 물 건너갔으니 내일 출근할 일이 없는 귀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로서는, 견디기보다 우회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불편을 말할 줄 아는 기술
방에 들어와 유튜브를 켰다. 가끔씩 보는 유튜브 채널 '조승연의 탐구생활'을 보는데 흥미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현대인들이 상실한 기술이 싸움 후 화해하는 기술이라고 생각해요. 싸우고 그 싸움의 강도도 조절하고 다시 화해로 회복하는 능력이 옛날에 인간관계를 길게 이어가던 시대에는 인간이 가져야 되는 가장 중요한 능력 중에 하나였어요."
싸우기보다 참거나 손절하는 경우가 많았던, 아니 그나마도 참으면서 만나고는 있지만 실은 마음으로 손절해 버린 경우가 많았던 나의 좁은 인간관계가 소환된다.
사회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 사람 아니다' 싶으면 카카오톡 차단 리스트에 넣어버리곤 했다. 소개팅을 했는데 헛소릴 하거나, 공모전 준비를 위해 꾸린 팀에서 만난 사람인데 너무 안 맞아 끝나버린 사이거나, 퇴사 후 절대로 연락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나는 손쉽게 차단버튼으로 영원한 이별을 고했다.
여러 직장을 다니면서 퇴사는 손절하기 좋은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나는 워커홀릭 쪽이었기에 일이 아무리 많아도 일말의 성취에서 느끼는 쾌감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다만 인간관계가 늘 괴로웠다. 업무 시간에는 그들을 마주하며 애써서 일하다가도 퇴근 후엔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심리상담소를 찾아 괴로움을 토로했다.
새로운 회사에 들어갈 때마다 나를 지독히도 힘들게 하는 사람이 한 명씩 나타났다. 그러니, 퇴사를 하면 손절부터 시원하게 해 보는 짜릿함. 돌이켜보면 퇴사할 때마다 그게 제일 좋았던 것 같다.
손절각 재는 한국 사회
요즘 사람들에게 손절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기보다는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처럼 소비되는 것 같다. 유튜브에는 <지금 당장 손절해야 하는 유형>, <손절해야 하는 신호> 같은 영상들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많은 호응을 얻는다.
내가 타인에게 괜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기 전에 손절해서 나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의 이런 콘텐츠들은 기회비용과 효율이 중요한 요즘 시대에 설득력 높은 주장으로 여겨진다.
복잡해진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를 경계해야 할지 더 자주 고민한다. 과거의 인간관계가 생활 반경 안에서 주로 이뤄졌다면, 이제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더 넓고 무작위로 이뤄진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괴로워진 밤이면 손절각 재는 콘텐츠들은 달콤하게 사람들을 유혹한다. 마치 다양한 인간상을 16가지 방법으로 단순화한 MBTI처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내가 취해야 할 액션을 '손절'이라는 간단한 해법으로 괴로운 밤을 보듬어주는 듯하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런 손쉬운 심리적 해법은 사람들 사이를 손쉽게 멀어지게 만들어 궁극적으로 인간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대화를 통해 관계를 풀어볼 수도 있었던 순간조차, '조용한 손절'을 외치는 영상에 기대어 관계를 단칼에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들게 한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끊어진 관계는 사람을 고립시키고, 새롭게 열릴 수 있는 기회마저 차단해 버릴지도 모른다.
손절각에서 공개처형형 영상으로
손절각의 또 다른 형태로 '공개 처형'형 영상이 있다. 손절이 개인적 단절이라면 공개처형형 영상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손절을 선언한다. 흔히 '지하철 빌런', '비행기 빌런' 등의 영상이 여기에 속한다.
법이 닿지 않는 모호한 경계에서의 상황을 영상으로 찍어 올리는 자와 시청자들과의 공감대를 형성되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지워지지 않는 기록으로 수치심을 주는 것만큼 확실한 형벌은 없으니 말이다.
이러한 영상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갈등을 조율하고 풀어내려는 마음보다는, 대화보다 고발을 먼저 택하는 냉혹한 오늘의 단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칠십이 넘은, 옛날 사람인 아빠가 걱정될 때가 있다. 최근 지하철 임산부 자리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임산부 석에 앉다가 임산부가 오면 비켜주면 되지 않냐는 아빠의 말이 걱정스러웠다.
"아빠,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그 자리엔 앉지 마세요. 아빠는 임산부가 오면 자리를 비켜줘야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빠가 임산부를 못 볼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 눈엔 임산부 자리에 앉은 개념 없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요. 누군가가 그걸 영상으로 찍어 올리기라도 하면 그렇게 낙인찍히는 거예요."
나 역시 누군가 임산부 석에 앉았고 임산부가 주변에 있다면 그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말하기보단, 내가 자리를 비켜주고 말 테니까.
그런데 가까운 사람은 손절할 수 없잖아요
하지만 손절할 수 없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나 가족관계에 들어서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과거에 표현하지 못한 불쾌했던 기억들과 상처 입은 흔적들은 기억의 저장소, '상처 입은 방'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샤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지하철에 앉아 있을 때 불현듯 튀어나온다. 그 조각들은 손절의 경계 그 어딘가를 부추긴다.
손절할 수 없는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일시적인 거리두기.
오프라인 만남도, 온라인 안부도 최소화하며 마음에서 몸에서 그들을 잠시 밀어내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나만의 안전지대에서 마음껏 안심하며 평온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이 안전지대의 평온함을 오래가지 못한다. 카톡과 전화가 울리면 이 조건부 안전지대는 무너지고 내 몸은 스트레스를 토해낸다. 신경이 예민해지고, 짜증이 치밀고, 배가 아프고, 화가 난다.
그렇게 다시 그들을 마주하면, 반가움에 애정의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묵힌 상처가 흘러나올 때도 있다. 그 모호한 마음으로 시간을 때우는 마음으로 보내기도, 나름의 보람을 느끼는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불편을 드러낼 용기
불편을 드러내고 갈등을 적극적으로 조정해 보는 행위는 10대 때 했어야 할 연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른의 말을 잘 따르는 착한 아이가 돼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고, 그 당시 다른 의견을 내는 일은 각 잡은 토론 시간에나 허락된 특별한 행위처럼 생각했다.
또래 문화 역시 그랬다. 조금이라도 다르면 배척당하기 쉬웠고, 왕따를 당하지 않으려면 언제나 다수의 편에 서야 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철학을 전공했지만, 학과에서 학점을 잘 받으려면 교수님의 말씀을 앵무새처럼 달달 외우는 게 중요했지 내 생각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주위에 불편함을 잘 표현해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됐다. 내가 이렇다 보니 타인의 생각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치밀었다. 좋은 마음에서 한다는 미명 아래 가해지는 모든 일방적인 행위를 증오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손절을 선택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 손절에는 타인의 무심함과 폭력성도 있었지만, 불편함을 드러내지 못했던 내 탓도 분명히 있었다.
이제 와서 불편을 드러내자니 어렵기만 하다. 얼마큼 드러내야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내 마음을 분명히 전달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혹여 내 의도가 왜곡될까 주저리 쓰는 글이 많아지고 미리 말을 준비해 보는 행위가 번잡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제라도 적절히 드러낼 용기를 포기하지 않고 내봐야겠지.
끊어낼 마음에서 드러낼 마음으로 가는 길. 내가 잘 걸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