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이제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단어다. 영화는 가난한 가족과 부유한 가족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충의 사전적 정의인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덧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영화 속 부유한 박 사장 가족은, 아무리 돈을 주고 서비스를 구매하는 형태라 할지라도, 운전 잘하는 기택 없이, 예술 치료 명목으로 아이를 잘 가르치는 기정 없이, 가정부 문광 없이는 일상을 유지하지 못한다. 감독은 이 관계를 통해, 기생의 관계가 단순히 물질적 관점의 '열성이 우성에게 기생한다'는 일반적 정의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두 가족이 서로의 삶에 얽히고설켜 기생하며, 그 관계 안에서 각자의 삶을 지속한다.
기생에 대한 다른 얘길 해보고 싶다
내가 다녔던 회사에서 만난 A차장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아주 드물지만, 그와의 기억은, 내 일상에 뜬금없이 떠올랐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거나, 샤워를 하거나, 멍하니 길을 걷다가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무의식 중에서라도 더 이상 그를 떠올리기 싫어서이다. 하여 이 글은 그를 내 무의식에서조차 결별하고자 하는 의식 행위이다.
10여 년의 회사 생활을 하며, 여러 조직을 거치면서 흔히 말하는 '빌런'을 몇 명 만나왔다. 빌런을 안 만날 수 있다면야 최고겠지만, 그렇다고 만나는 것이 아주 괴롭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내게도 빌런이라면 대게 다른 사람에게도 빌런인 경우가 많았고, 공통의 빌런이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의 결속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은근한 뒷담화가 빠질 수 없는 회사 생활에서, 공통의 적이 있다는 것은 대화 소재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게다가 정설이라 여겨지는 '또라이 불변의 법칙'에 근거하면, 조직원 모두가 좋다면 내가 빌런이지는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이 생긴다. 하지만 빌런 덕분에 때때로 나의 못난 구석이 가려지기도 하니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다.
사실 A차장의 첫인상은 꽤 괜찮았다. 이직한 첫날, 바쁜 팀원들 대신 그가 나를 맞이했다. 훤칠한 인상에 숱이 빽빽한 백발의 모습이, 전형적인 듬직한 차장님 모습이었다. 그는 우리 팀이 만들어내는 광고의 디자인을 전담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회사에서도 디자이너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내 업무 특성상 디자이너와 협업해야 하는 일이 많았고, 무엇보다 내가 기획한 것들을 실현시켜 주는 그들의 능력이 부럽고 멋졌다. 서로 합을 맞춰가면서 어느 순간엔 내가 '아' 하면 디자이너가 '어'를 해주는 지경에 다다라서, 우리가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 나오는 것만큼 보람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A차장과도 좋은 팀워크를 만들 수 있기를 기대했다.
나는 왜 서 있는가
하지만 며칠 가지 않아서, 나는 그가 엄청난 빌런임을 깨달았다. 그는 극단적인 우월주의자였다. 그는 같은 팀원들에게조차 전혀 공감되지 않는 자신만의 기준을 강요했다. 물론, 어느 분야든 일정 경력이 쌓이면 자신만의 '쪼'가 생기기 마련이다. 디자인 분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모두가 자기만의 '쪼'가 있기에 그만큼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도 있어야 한다. 아무리 바쁜 회사 생활에도 끊임없이 회의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소한의 공감이라는 연료가 있어야 업무에 추진력이 생기는 법이다.
팀장은 실무에 관여할 시간적 여력이 없었기에 A차장이 사실상 우리 팀의 실무 결정권자나 다름없었다. 이 회사는 내가 경험했던 다른 곳보다 훨씬 복잡한 결재 구조로 되어 있었다. 우리 팀에서 헉헉대며 일을 빠르게 처리해도, 협의를 태워야 할 라인과 보고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A차장은 실무자들이 만든 모든 업무를 빠꾸 시키기 일쑤였다. 그리고 이 모든 반려에는 얼차려가 동반되었다.
그는 실무자들이 보고한 업무 내용을 개선해서 어떻게든 일이 되게끔 만들기보다, 반려함으로써 자신의 똑똑함을 뽐내려고 했다. 그는 보고자를 불러 옆에 세워두곤, 최소 한 시간 많으면 두 시간이 넘게 장황한 설명을 늘어놨다. 그는 팀원의 스케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의자에 앉으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팀원들은 그의 호출을 받으면 꼼짝없이 옆에 서서 그의 일방적인 지적사항을 감내해야 했다. 게다가 그는 전자담배를 쓰지 않는 골초였다. 오랜 시간 그의 옆에 있노라면 담배 쩐내로 머리가 아득해지기도 했다.
"해야 할 다른 업무가 있습니다",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같은 말을 그는 가볍게 무시했다. 조근조근한 말투로, 정작 업무와 큰 관련도 없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과거의 어떤 사람이 했던 업무와 사규를 줄줄 읊어가며 본인의 똑똑함을 드러내기 바빴다. 나를 포함한 팀원들은 그의 의견에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상황을 유연하게 정리해 보려는 시도도 소용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우리 팀은 비효율의 늪에 빠져버렸다. 팀장이 지시한 업무조차 진척될 리가 없었다. A차장과 사이가 좋지 않은 팀장은 우리를 탓하고, 우리는 어쨌든 기한에 맞춰 일은 해야 하니 A차장의 입맛대로 업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입사 초반에 나는 그와 잘 지내고자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함께 외근을 갔을 때, 그에게 "차장님은 박학다식하셔서 대학원을 나오신 줄 알았어요"라고 말하자, "내가 배울 필요가 없는데 왜 대학원에 가야 하지?"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시간이 지나면서, A차장에게 느끼는 기괴함은 동료 팀원들에게까지 번져갔다. 나와 또래인 30대 여직원들은 그를 험담하더라도 실제로는 그에게 어떤 불편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옆에 앉아, 마치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선생님의 지도를 받듯 무조건 그의 지시를 받아들였다.
A차장은 우리 팀 동료들이 일할 때 다가가 갑자기 머리를 쓰다듬는다든지, 어깨를 주무르는 부적절한 행위를 하기도 했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기회를 보다가 팀원 중 나와 생각이 비슷해 보이는 한 직원에게 그 행동이 불편하진 않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너무 싫지만, 본인이 이 팀에 왔을 때 이미 이런 분위기여서 참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몇 가지 팁을 주었고, 이후로 A차장은 그녀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다. 누울 자리 보고 뻗는다더니, A차장은 내게 한 번도 그런 행동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수동적인 팀원들의 침묵 속에 고집과 독선을 견고하게 쌓아갔다. 나는 팀원들과 함께 뜻을 모아 비효율적인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고 모두가 공감할 만한 성과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들은 늘 뒤에서만 공감했을 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그 어떤 의견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녀들은 무얼 위해 침묵하는 걸까. 나는 생각에 빠진 적이 있다. A차장이 있는 조직의 어느 라인에 밉보이고 싶지 않은 걸까? 그가 하라는대로 하면 되는 간단하고 편안한 삶에 잠식당한 걸까? A차장이 부르면 한숨을 쉬다가도, 그의 옆에서 이내 곧 "하하 제가 그랬나요?" 등 뒤로 들려오는 웃음소리. 팀장이 지적하면 "차장님이 그러시는 걸 어떡해요" 하던 볼멘소리. 실무자로서 추구해야 할 가치도, 업의 진정성도 사라진 듯 뼈대만 남아버린 그 남루한 역할극을 바라보며, 나는 이 팀에 깊게 밴, 어느 평범한 악질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거리를 두기로 했다.
본질은 꾸밈 없이 드러나는 법
그 와중에 유일한 위안은 그룹장님이었다. 외부에서 초빙된 그녀는 여러 면에서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실행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팀이 보고를 들어갈 때 그녀가 준 모든 피드백은, 실로 탄탄히 실무를 쌓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전문적인 것이었다. 언젠가 보고 자리에서, 그녀는 A차장의 의견을 비판한 적이 있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을 하시는 그룹장님의 얘기를 들으며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나보다 몇 배는 산전수전 겪었을 그룹장님의 눈에 이 조직은 어떻게 보였을까. 그녀는 사무실을 오고 가며 우리 팀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번씩 뼈 있는 농담을 던지곤 했다. 그룹장님의 말씀에 하하 호호 웃던 팀장과 팀원들. 그 농담의 뼈를 몇 명이나 눈치챘는지는 모를 일이다.
합리적인 고민 없이 만들어진 결과물에 좋은 성과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A차장이 만든 보고서는 참 예뻤다. 교묘하게 예쁜 숫자로 잘 만들어진 보고를 위한 보고서를 만들었으니, 예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숫자들은 회사의 진짜 성과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업무와 성과가 헛돌고 있었다. 그룹장님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정리된 숫자가 아닌, 날 것의 숫자를 요구했다. 하지만 내가 만든 날 것의 보고서는, 다시금 예쁘게 포장되어 그녀에게 보고되었다.
기생하지 않으면서 생존하고 싶다
그렇게 A차장은 자신의 독선과 편협을, 지위라는 양분 위에 심고 살아갔다. 그리고 팀원들은 그에게 침묵이라는 양분을 제공하며, 동시에, 그의 부적절한 업무 생활이라는 양분 위에 비교적 편리한 생활을 영위했다. 이 구조 전체가 하나의 완벽한 쌍방 기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완벽한 이 구조를 끊어내려 했던 나의 부족하고 미미한 시도들이 처음부터 무모한 것이었던 것 같다. 남들 보기 괜찮은 회사이고, 사회생활이란 다 그런 거니 적당히 관망하며 돈을 벌었다면 좋았으려나.
기생은 누구도 비난할 수 없는 생존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정의는 아니다. 살아남은 자가 모든 걸 말해준다지만, 그들이 살아남은 방식까지 우리가 흠모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기생하지 않으면서 살아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