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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14. 2022

강릉일기 #4

솔향 수목원과 탑건

강릉에 도착한 그날부터 줄곧 흐리거나 비가 왔는데, 오늘 처음으로 눈부시게 맑은 아침이다. 동향으로 지어진 집이라 눈을 뜨자마자 마당과 데크가 뜨끈뜨끈한 열기가 올라온다. 클로이를 마당에 내놓아 콧바람을 쐬게 하고, 집안 곳곳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아침 식사는 어제 중앙시장에서 사온 커피콩빵에 인스턴트 커피를 마셨다. 


이틀째 마당을 벗어나 보지 못한 클로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갔다. 동네라고 해봐야 집이 달랑 여섯 채뿐이라 이 정도 산책으로는 클로이를 만족시킬 수가 없다. 용기를 내어 마을을 벗어난 산길로 올라가 본다. 이미 뜨거워진 길바닥에 폭우에 떠내려온 나뭇가지들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다. 오르막을 좀 더 오르니 아침마다 집앞으로 지나가던 측량업체 차량이 서있고, 집을 짓기 위한 기초공사가 한창이다. 여기에도 대여섯 채로 이루어진 작은 동네를 하나 짓는 모양이다. 집터는 아직 자리잡지  못했지만 이미 근사한 소나무 한 그루가 정원수로 심어져 있다. 집을 짓는 순서가 이렇게 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 클로이의 물과 사료, 자리를 봐준 후 강릉솔향수목원으로 향했다. 어제 그제 바다로 나가는 길에 솔향수목원 이정표를 눈여겨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지내는 곳에서 2~3km 거리에 이런 곳이 있다니, 더 늦기 전에 인사를 가야할 것 같았다. 강릉이 소나무의 도시, pine city인 것을 이번에 와보고 알았다. 운전을 하다 보면 곳곳에 키가 크고 몸통이 붉은 색인 금강송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강릉 수목원의 이름이 솔향수목원이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주차를 그늘에 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너무 뜨거워진 차를 타면 에어컨이 미친 듯이 작동하면서 그 맹렬한 소리와 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자칫하다가는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 차가 아직 새 차이던 어느해 8월에 담양에서 뙤약볕 아래 주차를 했다가 그런 사고를 냈다. 보험사 차량이 올 때까지 자리를 이탈할 수가 없어 계속 뙤약볕 아래 있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현기증이 난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도 여름에 주차를 그늘에 하지 않았다고 친구들끼리 티격태격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주차를 할 때에 그늘에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늘이 이동한다는 점을 깜빡해서 생긴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늘이 이동할 것까지 계산해서 주차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드라마에도 배울 점이 많다.


여름은 모기의 계절인 만큼 수목원 입구에서 해충기피제 스프레이를 뿌려야 한다. 예전에는 각자 해충기피제를 구매해서 들고 다녔는데, 요즘은 등산로 입구에도 이런 스프레이가 비치되어 있다. 얼마전 친구들과 청계산에 오르면서 알게 된 팁이다. 이걸 몰라서 혹은 귀찮다고 뿌리지 않고 갔다가는 모기에게 적잖은 헌혈을 하게 되는데, 피가 아까운 것보다도 가려움증으로 한동안 고생을 하게 된다. 사람들이 깜빡하기 쉬운 이런 물품을 입구에서 무료로 제공해 주니 참 친절한 서비스이다.


수목원에서 내가 써먹은 생활의 지혜 또 한 가지는 자외선 차단 패치이다. 지난 달에 친구들과 모여서 올림픽공원을 산책했는데, 한 친구가 자외선 차단 패치를 나눠준 것이다. 한창 주름과 기미에 예민한 나이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남의 눈이 무서웠던 우리는 이걸 붙이고 어떻게 돌아다니냐 했다. 그런데 그 친구의 남편이 골프 관련 일을 하면서 보니 요즘 골프장에서는 완벽하게 차려입은 여성 골퍼들도 모두 이걸 붙이고 피부를 보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중년 여성 한 패거리가 자외선 차단 패치로 광대뼈를 덮고 올림픽공원을 접수해 버렸다.


강릉 수목원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기도 하고 마스크까지 쓴 얼굴에 패치를 붙인다면 아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못 알아볼 터이니, 남의 눈보다는 내 피부가 더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어차피 햇살이 너무 강하고 눈이 부셔서 누구를 쳐다볼 상황도 아니었다. 패치를 붙이고도 특히 그늘이 짙게 드리운 길을 골라가며 수목원 산책을 시작했다. 오늘 강릉 기온이 34도까지 오른다고 하는데, 한여름에 비할 바는 아이지만 초여름 날씨로는 무척 덥다. 


내가 선택한 길은 무장애산책로(barrier-free), 즉 아무 걸릴 것이 없는 길이라 휠체어로도 다닐 수 있다. 뭘 알고 고른 게 아니라, 길을 들어서고 보니 그랬다. 나는 아직 다리가 건강하지만 굳이 힘든 길을 택해 내 능력을 시험할 생각도 없으니 잘 된 일이다. 몇발짝 가지 않아 형광색 조끼를 입고 계곡에서 물놀이하는 유치원생들을 만났다. 수목원이 산속에 있다 보니 계곡을 끼고 있는데 적당히 야트막하면서도 물이 넉넉하고 맑으며, 평평한 바위들까지 갖추어져 있어 어린 아이들이 놀기에 안성맞춤이다. 나도 발을 담그고 싶지만 이제 겨우 입장한 마당에 우선은 수목원을 둘러보는 게 급하다 싶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래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그 순간엔 그랬다.

야트막한 계곡에 물이 맑아 유치원생들이 단체로 물놀이를 왔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보이는 뱀조심 간판을 제외하곤 수목원의 모든 것이 아름답다. 수목원이란 본디 그런 곳이지만 가지런히 심어진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를 자꾸 강원도, 강릉이라는 특수한 장소와 연결시켜 본다. 도시에서 큰 돈 주고 가서 애지중지 키웠던 수국이 지천으로 피어있고, 밟으면 오드득 오드득 소리가 나는 열매를 잔뜩 떨어뜨린 때죽나무가 그 무게를 간신히 버티는 것 같다. 때죽나무 열매에는 독성이 있어 으깬 후 물에 풀어놓으면 물고기가 기절하기 때문에, 조상들이 낚시할 때 치트키로 사용하기도 했단다. 메추리와 이름이 비슷한 원추리는 알고 보니 다양한 종류의 백합, 나리(lilies)를 뜻하는 것이었다. 


사진 위쪽에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이 때죽나무. 나무 아래 잔뜩 떨어진 열매를 밟으면 오도독 오도독 경쾌한 소리가 난다.

수목원은 상당히 광활하고 여러 갈래 길이 있어 각자의 체력과 의욕에 따라 적당한 코스를 고를 수 있다. 나는 날씨가 무척 덥기도 하고, 산길을 오르는 데 익숙하지 않아 가장 짧은 무장애 코스만 빠르게 둘러보았다. 내려오는 길에 징검다리로 계곡을 건너며 동영상을 하나 찍었다. 꽤나 큼직한 송사리(라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어종은 모른다)와 우리 집 구피 어항에서 볼 법한 먼지 크기의 치어들이 가득하다. 


수목원 곳곳에는 포토 스팟이 마련되어 있는데, 강원도청인지 강릉시청인지는 모르지만 인스타그램 전문가가 활약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인스타 보기를 돌같이 하는 나조차도 수시로 카메라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관람객들이 지친 발을 담글 수 있도록 만들어진 미니 계곡에 낚시하는 소년의 모습을 만들어 앉혀 놓았다. 다행히 작은 물고기도 한 마리 낚싯대 끝에 매달려 있다. 이 아이가 빈 손으로 집에 갈 일은 없는 것이다. 너무 빠르고 쉬운 길을 택했다는 아쉬움에 여러번 뒤를 돌아보며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다행히 차는 아직도 그늘에 있었다. 

솔향수목원 계곡의 맑은 물
낚시하는 소년. 반듯한 자세로 조용히 앉아있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아침부터 더위에 겁을 먹은 나는 오후 시간을 극장에서 보내기로 했다. 여유롭게 예약도 하지 않고 극장에 간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칸 국제 영화제에서 송강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긴 <브로커>와, 같은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감독상을 안긴 <헤어질 결심>, 믿고 보는 톰 크루즈의 <탑건 매버릭>까지 볼 영화는 많았다. 나의 선택은 <탑건 매버릭>. 중년 아줌마 혼자 보아도 오해의 소지가 없을 것 같았고 다른 두 영화와 가장 달라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헐리웃 영화라 좋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 보기로 했으니 말이다.


영화의 인트로 부분이 어려서 봤던 오리지널 탑건 영화와 거의 같았다. 그게 기억난다는 것도 신기하다. 스토리가 나름 손에 땀을 쥐게 하는—불가능한 미션을 톰 크루즈니까 해내는— 구성인지라 스스로 내 팔을 너무 꽉 쥐어 살짝 꼬집듯이 한 채 봤다. 마침내 미션에 성공하고 톰 크루즈가 착륙할 때 상영관 안에서 나 홀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톰 크루즈의 수많은 스펙타클한 영화 중에 하나일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과거에 일어난 비극의 주인공끼리 서로 소통할 기회 없이 십수 년을 보낸 후 마침내 오해를 풀고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워하던 사람에게 감사하고, 의지하게 되는 그런 마법 같은 이야기 말이다. 스크린X 2D 영화 한편에 17,000원. 극장에서 영화 관람도 슬슬 사치품이 되어 간다.


강릉CGV 바로 옆이 중앙시장이라 어제 패스했던 오징어순대를 샀다. 통오징어의 속을 당면과 잘게 다진 채소 등으로 채워 찐 다음 김밥처럼 동글동글하게 썰어 계란물에 적신 후 동그랑땡처럼 부쳐주는 음식이다. 배니닭강정과 마찬가지로 방송에 출연했던 어느 집이 시장 한가운데에서 손님을 독점하고 있다. 금 체인을 주렁주렁걸고 있는 젊은 남자가 호객을 한다. 그 남자에게 돈을 내고 주문을 하면 장신구도 화장기도 하나 없는 여자들이 뜨거운 불 앞에 서서 음식을 만들어 준다. 괜한 오해일 가능성이 높지만,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또, 저 남자는 돈을 버는 재미야 있겠지만, 그야말로 인생을 돈과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아차차! 내가 이번 여행에서는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냉장고에서 어제 넣어둔 강릉 버드나무 브루어리 맥주가 기다렸다. 오늘도 병따개는 없으므로 숟가락으로 열었다. 어제보다 조금 쉽게 열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아직은 여전히 초보자이다. 오징어순대와 맥주를 배불리 먹고 나니 오늘의 일정이 끝났다. 큰댓자로 쭈욱 뻗으니 마룻바닥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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