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사람 되어보기 (동네 산책과 고래책방)
생활환경이 달라진 덕인지 계속해서 아침에 눈이 일찍 떠진다. 더워지기 전에 해치울 요량으로 눈꼽도 떼지 않고 마당에 잡초를 뽑았다. 한참 뽑고 시계를 보니 5시 50분. 몇시에 일어났는지는 확인하지 않아서 모르겠다.
클로이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갔다. 마당에 풀어준다고는 해도 산책을 시켜주지 않으면 여전히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마당을 벗어나고 싶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오전에 길게 산책을 시켜놓으면 슬그머니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 저지레를 하는 것은 아무래도 에너지가 남아돌 때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당에 내놓은 클로이가 보이지 않을 때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tvN 예능 삼시세끼 <고창>편에서 유해진 씨는 겨울이라는 이름의 반려견 웰시 코기를 데려온 적이 있다. 유해진 씨는 겨울이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일단 다급한 톤으로 “겨울아, 안돼!”라고 외친다고 했다.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멈추라는 뜻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클로이가 보이지 않으면 최대한 큰 목소리로 "클로이 안돼!"라고 소리친다. 그러면 뒷마당으로 가는 길목이나 텃밭, 혹은 별채 뒤쪽에서 클로이가 숙제를 안 해온 초등학교 1학년 같은 표정으로 슬금슬금 모습을 나타낸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TV 예능에서도 배울 점은 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모터 소리가 요란하다. 노부부 한쌍이 꽤나 너른 밭을 갈고 있다. 농기계를 이용한다고는 해도 노인 두 분이 농사 짓기에는 상당한 크기로 보인다. 옥수수 한 고랑, 토마토 한 고랑, 깨 한 고랑, 감자 한 고랑. 도시에 나가 사는 자식에게 요것조것 골고루 바리바리 싸서 보내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지금 갈고 있는 저 밭에는 어떤 작물을 심으려나, 언뜻 보기엔 깨 같은데 두고 보면 알 일이다. 밭에는 높은 펜스를 둘러놓아 클로이가 제멋대로 뛰어 들어갈 일은 없다.
동네길을 내려가다 보면 <추억의 시작>이라는 웨딩 촬영 전문 스튜디오와 <정의윤 가옥>이라는 조선시대 고택이 있다. 스튜디오는 한번 들여다보고 싶은데 지키고 있는 삽살이의 기세에 눌려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려갈 때는 그냥 짖기만 하더니 돌아오는 길에는 집 앞까지 나와 어찌나 기세등등하게 짖어대는지,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왔다. 클로이도 그 집이 삽살이의 영역으로 인정을 해주는 건지 대응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간다. 한편으로는 작은 개가 자기 몫을 하겠다고 열일하는 것이 귀엽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러다 정말 나를 물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걱정스럽기도 했다. 목줄 없는 개는 어쨌거나 완전히 안심하기 어렵다.
반면 <정의윤 가옥>은 대문이 활짝 열려있고, 고양이 한 마리가 지키고는 있으나 누가 들어오는지 마는지 관심이 없었다. 대문 자체가 길보다 서너 계단쯤 높아 지나가는 사람이 우러러보게 만드는 구조를 가진 집인데, 들어가 보니 대문 간에 바로 말구유와 사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텃밭에 작물이 자라고, 비료가 층층이 쌓인 것을 보니 누군가 살고 있는 듯하여 놀랐다. 안채의 문이 닫혀 있는 걸 보니, 내가 들어간 바깥채까지는 들어가도 되는 곳인가 보다. 어쨌든 방해는 되고 싶지 않아 고양이에게만 눈인사를 하고 조용히 나왔다. 나오는 길에 대문에서 입춘지를 발견했는데, 흔히 보는 '입춘대길 건양다경' 여덟 글자가 아니라 훨씬 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입춘대길 만사여의 형통 부모천년수 자녀만대영 만복함지 건양다경: 입춘에 크게 길하여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부모님은 천수를 누리시고, 자녀는 만대를 이어 번영하리라. 모든 복이 다함 없이 이루어지고 따뜻한 기운이 일어나 경사가 많으리라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복을 기원하던 오랜 전통의 흔적이다. 미신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조상들은 이렇게 복을 비는 마음도 간절하면 정성이라 여겼고,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켜 뜻이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나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복을 비는 습관을 들여 볼까.
오후에는 강릉의 명물이라는 고래책방을 찾았다. 친구가 천안에 <가문비나무아래>라는 독립서점을 오픈하면서 나도 동네 책방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래책방은 3층짜리 단독 건물로 이루어진 문화공간이었다. 1층에는 고래빵집과 카페, 책방이 들어가 있고, 2층은 어린이 책방과 스터디룸, 3층은 프레젠테이션과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는 방과 응접실이 있다. 지하 1층은 협소한 편인데, 박경리 작가와 강릉에 관련된 책들로 꾸며져 있다. 건물 뒤편에 별도의 주차장이 있을 정도로 독립서점 치고는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전체의 느낌이나 인테리어가 세련되면서도 편안함을 주는데, 화장실과 층계 참까지도 세련된 감각이 느껴진다. 커피 한잔과 책 한 권을 구입하여 오후 내내 자리를 옮겨 가며 독서를 해도 좋을 것이다. 3층은 책방을 떠나기 직전에야 가보게 되었는데, 커다랗고 푹신한 바다색 소파가 너무나 근사했다. 그 넓은 공간에 고객 한 명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진작에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3층에서 책을 읽었을 것이다. 최근에 전자책으로 한 번 읽었던 'H마트에서 울다'를 종이책으로 다시 읽기 위해 구입하여 돌아왔다. 딸아이도 같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내가 사는 곳에 고래책방이 있다면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들러 시간을 보낼 것 같다. 대한민국 방방곡곡 고래책방이 하나씩 있다면 훨씬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오늘은 비로소 관광객 모드를 좀 벗어나 강릉 사람처럼 지내본 것 같다. 이제 동네 지리는 어느 정도 파악하였으니 다음에는 동네 사람들을 한번 만나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