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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14. 2022

강릉 일기 #5

테라로사와 유리알 유희

어제에 이어 오늘도 구름 한 점 없는 아침. 옆집 마당에서 잔디 깎는 소리에 잠을 깼다. 며칠간 내린 비로 마당에 잡초가 쑤욱 올라와 신경이 쓰이던 차라 잔디 깎기를 마친 옆집 아주머니에게 잔디 관리 비결을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별 거 없었다. 그냥 아침저녁으로 매일 뽑으란다. 


내친김에 맨손으로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마당에 그늘이 꽤나 길게 드리웠다. 옆집도 새벽부터 잔디를 깎은 이유가 이 그늘을 활용해 더워지기 전에 일을 마치기 위한 것이다. 처음에는 키가 크고 줄기가 확실해서 손에 잘 잡히는 녀석들로만 뽑았다. 해가 높이 올라가면서 마당에 드리웠던 그늘이 점점 작아졌다. 그늘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도 뽑을 수 있는 잡초를 뽑고 또 뽑게 되었다. 그렇게 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잡초를 뽑아 놓으니 마당은 꼭 코미디언 심형래의 영구 분장에서 머리에 난 땜통 같기도 하다.


배도 고프고 덥기도 더워서 오늘의 잡초 뽑기를 마무리했다. 뽑아놓은 잡초들이 되살아날까 두려워 데크 위에 모아놓았더니 제법 수북한 더미가 되었다. 아무리 잡초가 생명력이 강하다고는 해도 여름 햇살 아래 금방 쪼그라들어 저녁 무렵에는 그 부피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아침 식사도 마다하고 열심히 뽑았지만 아직도 뽑아야할  잡초가 한참 남았다. 옆집 아주머니 조언대로 아침저녁으로 뽑아야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목표는 테라로사 강릉 본점 다녀오기. 어제 솔향수목원을 다녀온 덕분에 테라로사가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테라로사 카페는 다른 누구보다도 남편과 함께 가장 많이 갔던 곳이다. 우리가 처음 간 테라로사는 서울에 있는 포스코센터점인데, 대치동 학원에 딸아이를 보냈을 때 아이가 학원 수업을 듣는 세 시간 동안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곤 했다. 포스코센터는 내가 20대에 근무한 회사가 있던 빌딩이다. 이제 그 회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당시 대한민국 최초이자 최고의 인텔리전트 빌딩이라는 포스코센터에서 근무하는 자부심은 대단했다. 멋진 건물에 근무한다고 내가 멋진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땐 그렇게 어렸다. 건물 외부에는 귀한 금강송으로 조경을 하고, 1층 로비에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 미술관, 분수대까지 갖춘 강남의 랜드마크라고 해서, 회사에서도 그 빌딩에 임대로 들어가는 것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었다. 이제는 테헤란로의 흔한 고층 빌딩 중 하나가 된 포스코센터에 나름 개성을 부여해 주는 것이 1층에 자리한 테라로사이다. 그곳에서 남편과 내가 딸을 기다리며 앉아 있자니, 쏜 화살처럼 날아가 버린 수많은 날들이 떠올라 기분이 괜히 울적해지곤 했다. 


우리가 두 번째로 함께 간 테라로사는 세종점이다. 남편과 내가 처음 집을 장만한 곳이 세종인데, 남편 직장이 서울로 옮겨간 후에도 주말에는 집으로 내려와 시간을 보낸다. 세종은 참 살기 좋은 도시이지만, 매력적인 상업시설은 많지 않다. 그런 곳에 테라로사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특별한 일 없는 주말이면 남편과 나는 테라로사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맞은 편 테라로사 키친에서 식사를 하기도 한다. 미식가인 남편은 다양한 원두와 블렌드의 커피를 마시고, 화덕에서 금방 구운 피자를 먹고, 양질의 올리브유와 프로슈토 같은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한 이탈리안 음식을 먹어보는 것에 큰 기쁨을 느낀다. 


그렇게 테라로사에 대한 충성심을 형성한 내가 강릉에 있으면서 본점을 안 가볼 수는 없다. 카카오내비에  찍어보니 단 8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주차장에 들어서 보니, 왜 강릉 본점을 커피 공장이라고 하는지 알겠다. 일단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면 은은한 빛깔의 벽돌을 쌓아 올린 외벽이, 여름에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따스한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온도가 따스하다기보다는 따스한 환대의 느낌이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다. 몇 발짝 더 들어가면 그 벽돌벽을 뒤덮어 지붕까지 이어진 능소화 덩굴이 청신하다. 지금 살고 있는 친구 집에도 능소화 덩굴이 있는데 아치형 지지대에 다소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이렇게 벽돌벽을 타고 올라가니 안정감이 있어서 좋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니 노출 콘크리트, 벽돌, 철재 등 건축자재를 그대로 드러낸 뻥 뚫린 공간에 감각적인 조명과 미술품, 창문을 적절히 배치하여 개방감 넘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세종점이나 포스코센터점은 누가 뭐래도 도시적인 느낌이 강한데, 이곳은 조금 더 편안하고 다정하다고나 할까? 

테라로사 강릉본점의 외관. 쌓아올린 벽돌 못지 않게 바닥에 헤링본 스타일로 깔아놓은 벽돌도 아름답다.


주말이라 그런지 손님이 많아서 은행처럼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려 주문을 한다. 현재 17명 대기 중. 168번 번호표를 뽑아 들고 위층 아래층 계단을 오르내리며 매장을 탐험했다. 포스코점과는 달리 좌석이 넉넉하여 대기 중인 손님은 많아도 자리가 없어 곤란한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아직 주문 전이지만 코너에 준비된 얼음물 한잔 따라 마시고, 좋은 자리를 물색한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여름 특선이라는 피치 서머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주문을 하기까지도 20분을 기다렸는데, 커피가 나오기까지도 20분을 기다리라고 한다. 하지만 급할 것 없는 나로서는 대기 시간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평소에도 이런 여유를 갖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음료를 기다리며 둘러보니 이번엔 손님들이 눈에 들어온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마른 사람, 뚱뚱한 사람, 어린 아기, 노인, 메이크업을 완벽하게 한 여자, 메이크업을 전혀 하지 않은 쌩얼의 여자, 맨발에 샌들을 신은 사람, 두꺼운 양말에 등산화를 신은 사람, 발목이 없는 페이크삭스에 구두를 신은 사람, 저마다 자기 사정에 맞는 차림으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딜 가도 미인대회 참가한 듯한 멋쟁이 여자들로 가득한데, 여기는 그렇지 않아서 좋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럽 여행기 먼 북소리를 보면 로마에서 크리스마스 즈음에 거지들을 관찰하며 쓴 에피소드가 있는데, 평소같으면 어림도 없을 그런 여유를 여행자는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나도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테라로사에 온 사람들을 이렇게 살펴본 적이 없다. 사람 구경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에는 그 사람에 집중하기도 하고 내 자신이 풍경의 일부가 되면 아무래도 순수하게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40분 만에 받아든 피치 서머 아이스커피를 여유 있게 마시고 (이번에도 맛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바다 뷰와 함께 메밀국수를 먹으러 강문해변으로 향했다. 강문해변은 이제 초행길이 아니라 수월하게 주차를 하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벌써 3시를 향해 가는 시간인데도 토요일이라 그런지 대기자가 많다. 키오스크에 전화번호를 등록하고 해변으로 나갔다. 양팔을 들면 겨드랑이와 옆구리로 찬바람이 느껴진다. 아침에는 무척 더운 날씨였는데 오후 들어 날이 서늘해진 것인지 아니면 바닷가라서 더 시원한 것인지 모르겠다. 


식당 바로 옆에 선물가게가 손님으로 북적북적하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나처럼 식당에 대기를 걸어둔 손님인지도 모르겠다. 독특하고 깜찍한 선물이 많지만, 특히나 명주실을 감은 북어 목각이 인상적이다. 어렸을 때는 우리 집에도 현관 위로 명주실을 감은 북어가 먼지를 덮어쓰고 걸려있던 기억이 난다. 집안에 복을 불러온다며 이사할 때 그 자리에 걸어둔 것이다. 요즘은 이사 선물로 화장실용 화장지나 세제를 주는데, 값은 좀 비싸지만 이런 선물도 좋을 것 같다.

집안에 복을 불러온다는 북어와 명주실타래. 과거에는 실물을 대청마루 위나 현관문 위에 걸어두었는데 요즘은 그 전통이 사라진 듯하다. 값은 좀 나가지만 이사 선물로 좋을 듯.


마침내 내 차례가 되어 막국수집 2층에 자리를 잡았다. 나와 바다 사이에는 통유리 한 장뿐. 이렇게 쉽게 바닷가 1열을 차지할 수 있는 곳이 강릉이다. 막국수와 함께 메밀 김밥을 주문하였다. 막국수는 별로 인상적이지 않지만 메밀 김밥은 비주얼도 산뜻하고 맛도 아주 가벼웠다. 김밥 위에 얹은 노란 퓌레와 갈색 퓌레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서빙하는 직원은 알지 못했다. 계산하면서 사장님께 물어보니 예상대로 단무지와 무간장절임을 간 것이었다. 메밀국수를 무즙 섞인 간장 소스에 찍어 먹는 데서 착안한 듯한데 참신한 아이디어다.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고,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사진을 찍지 않은 것이 아쉬워 한번 더 다녀와야겠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리알 유희>라는 기념품 가게를 만났다. 바다로 흘러들어 간 유리 조각이 수십 년 동안 파도와 모래에 마모되어 끝이 동글동글해진 상태로 해변에 다시 밀려오는데, 이 바다 유리를 가지고 만든 공예품을 판다. 인간의 부주의함과 무책임함을 일깨워주는 가장 바다다운 방법이 이 바다 유리가 아닌가 한다. 자연만이 창조할 수 있는 비정형의 다양한 모양과 은은한 색감의 바다 유리는 팔찌, 반지, 목걸이 등 액세서리는 물론 차량용 석고 방향제, 열쇠고리 등 다양한 아이템으로 다시 태어났다. 영업하는 곳이라 사진 찍기가 조심스러웠지만, 인스타그램 시대답게 촬영히 허용되는 코너들이 있어 몇 장 담아왔다. 


이렇게 해서 강릉에서 하루를 더 보냈다. 비록 아침 일찍 잡초를 뽑긴 했지만, 아직은 주민이라기보다 관광객처럼 지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강문해변 뒤쪽에 '유리알 유희'라는 나즈막한 선물가게가 하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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