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 4
입덕 부정기
대상(보통은 아이돌)의 덕후가 되기 전 스스로를 부정하는 단계를 '입덕 부정기'라고 부른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며 체면을 차리는 단계라고 볼 수 있으며, 입덕으로 가기 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그전까지는 '호감이더라'에서 '나 팬이잖아' 정도로 가볍게 말할 수 있었던 것에서 '입덕' 이후는 좀 달라진다. 이제부터 나의 모든 관심사는 입덕 대상이고, 대상의 모든 활동을 쫒는 것부터 시작해서(이전의 모든 영상과 사진 등 온라인 상의 모든 발자취를 쫒는 과정) 새로운 '떡밥'이 뜨면 라이브부터 재탕, 삼탕 등 온갖 우려먹기를 시전 하게 된다. 아이돌의 경우 무대 영상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올라오기 때문에 개인 직캠부터, 입덕 직캠, 전체 풀캠까지 수없이 많고 이 영상들을 능력자들이 짤(보통은 GIF 이미지를 의미)로 쪄서 올려주면 이것을 또 복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공식적으로 제공한 것을 2차로 가공하여 소비하는 문화야말로 덕후 문화의 꽃이다.
저는 팬이지 덕후가 아닌데요?
나 같은 경우는 보통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좋아하지 못하는 편이어서, 입덕 한 이후부터 시간과 공력이 최애 중심으로 돌아갔다. 사실 처음엔 이것이 '입덕'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냥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오디션 프로그램 기간 동안에 열성으로 응원했고, 데뷔 이후에도 자연스럽게 모든 콘텐츠를 찾아보았다. 나는 스스로를 여전히 '팬' 이라고만 생각했지 '덕후'라는 것은 뭔가 지나치게 열정적인 사람들이며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팬클럽 명으로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도 오글거렸고, 온라인에서조차 소심하게 좋아요를 누르는 것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 일기를 보면, 거의 매일에 최애 얘기가 들어가 있는데 말이다. 퇴근 이후로 찾아보는 게 거의 유일한 낙인 것처럼 보이는 기록들도 있다. 모든 것들이 다 한쪽으로 수렴되고 있었는데 대체 왜 관찰자 시점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었던 건지. 아마도 내가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10대 때 주변 친구들이 보이그룹을 좋아할 때도 나는 괜히 멋에 취해 솔로 가수나 해외의 배우들을 동경하고는 했었고, 대학에 들어와서는 운동할 때나 축제 때 밝은 댄스곡을 들어야 할 때를 빼고는 아이돌 음악을 들은 기억이 없다. 인디음악, 브릿팝, EDM 등등 온갖 있어 보이는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 내가 이제와서 훅하고 아이돌에 감겨, 한동안 아이돌의 음악만 찾아볼 줄 알았겠는가? 이것이 내 입덕 부정기의 원인이었다. 팬이긴 한데, 덕후는 아니에요. 따위의 말을 뇌까리면서 말이다.
그러다 어느날 <최애가 부도칸에 가 준다면 난 죽어도 좋아>라는 애니메이션을 보게되었다.
이 작품은 앞서 이야기했던 <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와 같이 지하 아이돌 멤버를 좋아하는 여성의 이야기이다. 처음 접했던 것은 트위터에서 굉장히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 에리피요라는 주인공은 덕후의 가장 극단적인 버전이 아닐까 싶은데, 최애의 굿즈를 사기 위해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대상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 자체는 순수해서, 덕질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구석이 있었다. 제목 그대로 정말 최애가 유명해진다고 한다면 본인은 죽어도 된다고 소리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현재 이 작품은 애니 전문 OTT 서비스인 라프텔에서 서비스되고 있는데, 다른 작품들보다도 여성의 성별이 높다. 그것을 보며 한편으로는 나와 같은 '여덕' 친구들이 많다는 것에서 안도를 느꼈고 괜스레 위안을 얻었다.
이후로 나는 순수하게 대상을 응원하며 잘 됐으면 하는 무해한 마음이야말로 바로 덕질이라는 걸 깨닫고 스스로를 정체화하게 되었다. 거리를 두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삶에서 가장 큰 낙이 이미 최애가 되어버렸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