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제어 버튼

뻔한 술 이야기 - 13

by 시그리드

술 제어 버튼

몇 년 전, 위경련으로 고생을 한 이후로 건강검진 때는 꼭 위내시경을 한다. 위에 좋다는 양배추즙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밀가루 음식들도 되도록이면 피하고 있다. 한번 위험신호를 보냈던 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탓인지, 막상 건강검진 결과는 언제나 큰 문제가 없었다. 현대인이면 누구나 달고 사는 흔한 ‘위염’ 정도만 확인되었다.


그렇게 작년 11월에도 큰 문제없을 거라는 생각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문제는 간에 있었다.

혈. 관. 종.

낯선 존재가 나의 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에게 말도 없이.


악성으로 발전될 가능성은 낮고, 주변에 물어보니 혈관종 다들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는 오버고 몇 명 있었다) 조금 마음이 놓였으나. 뭔가 그 뒤로부터 신경이 좀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술에 대한 나의 애정과는 별개로, 우리 집은 간에 대한 가족력이 있다. 그래서 그 결과를 받았을 때 가족들에게는 별 것 아니라며 온갖 쿨한 척은 다했으나 속으로는 살짝 걱정이 되었다. 내 양심 내지는, 술 제어 버튼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약간의 술은 '약주'라고 불릴 정도로 혈액순환을 촉진시킨다지만, 보통 즐거운 것들은 공짜가 아니기 마련이다. 그냥 재밌기만 한 것은 없고, 그런 것들은 시간이든 체력이든 정신이든 재산이든 혹은 사람이든 무언가를 가져간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후로부터, 술이 주는 즐거움이라는 효용에만 집중하면서 살아왔다. 일어날 필요가 없는 에피소드들이 생기기도 하고, 맨 정신에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사실 시간이 지나면 '무용담' 정도로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술을 끊었습니다....?

나보다 먼저 혈관종에게 간을 세놓아준 '혈관종 보유 선배' P언니에 따르면 혈관종의 주요 원인은 술이라고 했다. 세상에, 최근엔 예전만큼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제는 끊어야 하는 것인가? 이건 다음날의 숙취와 때때로 생각나는 창피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대가였다.


그렇게 술을 끊었습니다... 일리가 없지. 나는 그럼에도 술을 마신다. 물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가끔씩만.

퇴사를 하고 자유인이 된 후 자동적으로 불필요한 술자리도, 술을 많이 먹는 일들도 줄었다. 술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큼 사람이나 일로부터의 스트레스가 없기도 한데, 술을 사는 게 "Sibal 비용"이었단 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혈관종에 대해서 다시 찾아보았는데 사실상 혈관종의 주요 원인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성의 호르몬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라고 한다. 술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이 양성 종양이 생명을 위협하는 악성 종양으로 발전되는 일은 거의 없는 데다 예방법도, 치료약도 없다고. 그냥 간이 힘들다 파업하기 전에 보내는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하려고 한다. 간에게도 핑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To 나의 혈관종, 사라지거나 커지지 말고 그냥 그대로 있어줘.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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