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권하는 사회?
많은 콘텐츠에서 '술' 은 매우 요긴하게 사용된다.
드라마에서 술 마시는 장면이 등장하면 주인공이 외롭거나, 괴로운 것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들이 진심을 확인하고 서로의 관계가 전환되는 계기는 함께 술을 마시거나 한쪽이 취기를 빌려 고백하고 나서다. 예능에서 '술'은 인물의 솔직함을 드러내거나, 멀고 먼 연예인이 아닌 그냥 일반 사람으로서 느껴지도록 만드는 데 아주 효과적이다.
작년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부터 패널과 술을 함께 마시는 음식 예능 <백스피릿>, 술을 주제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술트리트 파이터> 까지 본격 술을 주제로 한 콘텐츠들이 넘친다. 위의 언급한 작품들은 티빙, 넷플릭스, 유튜브에 이르는 TV 방송심의규정을 따르지 않는 좀 더 자유로운 영역에 있지만 사실 술은 다른 유해요소라 불리는 것들에 비해서 규제가 느슨한 편이다. 이제는 퇴출된 담배나 다른 기타 약물 등에 비하면 묘사가 자유로운 편인 것이다. 물론 10시 이전까지 TV광고나 영상 형태의 옥외광고도 금지되어 있는 등 청소년 보호를 위한 장치들은 존재한다.
드라마, 예능 등에 묘사된 음주 장면이 과도한 음주를 조장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았다.
콘텐츠의 영향력은 분명 있다. 먹방 유튜버의 방송 하나가 조용하던 동네 식당을 몇 시간 대기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맛집으로 만들기도 한다. 적절한 PPL로 들어간 치킨은 드라마 방영 기간 중 없어서 못 파는 지경에 이른다. 나의 경우 과거 연인들의 재회를 다룬 <환승 연애>를 즐겨보았는데, 가끔 보면서 술을 마셨다. 감정적으로 몰입한 데다, 패널들과 주인공들이 술을 자주 마셨기에 마시는 맛이 있었다.(애초에 패널들의 앞에는 맥주가 세팅되어 있었다) 나는 이런 것들이 특히 '먹방' 에는 어느 정도 유효하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만큼 먹는 것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술을 애초에 좋아하지도, 먹을 생각도 없던 이들이 콘텐츠에 묘사된다고 술을 따라 마시는 것은 아니다. 콘텐츠에서 술 마시는 장면을 본다고, 술을 매일매일 찾게 되며 중독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이런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탄환 이론'인데 대중매체가 아주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거의 100년 전에 등장하여, 신문방송학과 전공 시간에서나 만나는 그런 역사 속으로 사라진 주장이다.
술의 신과 함께
스물세 살 무렵일 것이다. 교환학생을 갔다가 바로 복귀한 가을 학기에서 나는 고삐 풀린 말처럼 술을 마시고 다녔다. 정신없이 들이붓던 스무 살 무렵을 지나 조금은 잠잠해졌던 '술의 신'이 다시 눈을 뜬 것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이 반가웠기 때문이고, 얼마나 살았다고(실제 고작 8개월 살았음) 유럽 병에 걸려 한국 물가 너무 싸! 를 연발하면서 돈 아까운지 모르고 술 약속을 잡아댔기 때문이다.
그날도 술을 마셔야 할 핑곗거리가 있었으므로, 친구와 과하게 술을 마셨다. 핑계는 만들기 나름이었으므로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성을 잃고 술을 마셨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 집 화장실 바닥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른쪽 얼굴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놀란 마음에 급하게 엑스레이도 찍어보았으나 다행히 뼈가 금 간 것은 아니었다. 나를 진단한 의사샘에 따르면 '타박상'이었는데, 이게 부어오르는 것도 모자라 점차 색깔이 변하면서 멍까지 들었다.
참 어리고, 술냄새 나는 글. 그때 블로그에 남긴 것을 찾았다.
문제는 그 주에는 거의 1시간 동안 혼자 발표해야하는 '사회조사방법론'이라는 전공 필수 수업이 있었다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도 멍은 빠지지 않았다. 어디 맞고 온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서 발표날엔 비비크림과 컨실러로 상처를 덕지덕지 가렸는데 나중에 다 끝나고 얼굴을 보니 노오란 멍이 다시 원상 복귀되어있었다. 많이 까일까 봐 걱정했는데 애들이 질문을 안 하더니... 동정심을 산 걸까? 하여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이때, 발표했던 주제는 '미디어에 묘사된 동성애와 그 영향-성적 정체성과 그 영향'이었는데 미디어가 성적 정체성도 바꾼다는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 요지였다.
술을 마시고 난장판을 겪은 후 탄환 이론이 유효하지 않음을 발표했던 내가, 미디어에 묘사된 술이 음주를 조장한다는 주장에 반하는 글을 쓰고 있자니 왠지 웃음이 난다.
그때의 생각이나 지금이나 같다. 실제 범죄 영화가 많이 나온다고, 범죄율이 올라가지 않으며 퀴어 콘텐츠가 많이 나온다고 이성애자가 갑자기 동성애자가 되지 않는다.
술을 마시게 된 진짜 이유
술 권하는 콘텐츠가 많아진 것 때문에, 성인의 음주량이 올라간다는 주장은 그래서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를 술 마시게 하는 요소들은 수없이 많으며 코로나 이후로 음주 소비량이 올라간 것은 우리가 더 혼자 술을 즐기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 고독해졌기 때문에, 혹은 술로 어떤 결핍을 해소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들이 술을 더 마시게되었으므로 대중매체에서 술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고, 사람들은 그 솔직함에 공감하고 찾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술꾼 도시 여자들> 은 온전히 술을 메인으로 하는 몇 안 되는 드라마였다. 특히, 그동안 볼 수 없었던 2030 여성들이 자유롭게 술을 마시며 성장하는 드라마였고 시청자들은 이 솔직함에 열광했다.
다만,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술을 아직 마실 수 없는 청소년들이 '술을 맛있는 것' '기분 좋아지는 것'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유해성은 낮다고 하더라도, 지나치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술이므로. 술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갖지 않게 만드는 것,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며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 술이 책임감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