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한잔 합시다

뻔한 술 이야기 - 17

by 시그리드


우리 각자의 술 한잔

우리는 '술 한잔 합시다'라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많이 쓴다. 여기서 술 한잔은 얼마나 될까? 나에게 한잔이 다른 사람에겐 열 잔이 될 수도 있고. 누구랑 먹을 때는 맥주 한잔 누구랑 먹을 때는 소주 한 병이 될 수도 있다. 각자가 가진 주량에 따라 굉장히 주관적인 표현인 것이다.


이 주량에 관해 이야기를 하자면, 상대의 주량을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와 함께한 시간이 쌓여 있으며, 특히 그 자리엔 술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평소에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어느 정도는 소울을 공유한 관계라는 것. 주량이 거의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인연이라고 칭해야 할 정도로 만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보통 술을 마실 땐 서로의 속도를 맞춰주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의 주량을 알고 그를 배려하는 행위 자체는 뭔가 멋스러운 데가 있다. 상대와 양을 맞춰가면서, 덜 마시거나 더 마시더라도 그 취기의 속도를 일치시키는 것 자체가 주는 감동도 있고. 나는 이런 다정한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


술 한잔 합시다

'한잔' 이란 단어는 꽤나 산뜻하다 . 두 잔 혹은 세 잔과는 다른 부담 없는 그런 것. 얼마나 무심하지 않고, 적당히 가벼운 표현인가?


'밥 한번 먹어요' 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의 관용어다. 밥 한번 먹자는 (나 같은 INFJ의 경우) 대체적으로 친하지 않은 상대와 이야기를 끝내야 할 때, 실제의 만남은 고려하지 않은 채 그냥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은 오랜만에 근황을 캐치업 하자는 의미, 혹은 정말 친하지 않은 업무상 관계를 돈독히 한다거나 할 때 쓸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술은 낮보다는 저녁 시간을 활용하여 만나기 마련인데(물론 낮술도 충분히 가능하다), 평일 기준으로 1~2시간의 한정된 점심시간보다 더 긴 시간 동안 만날 수 있다는 것에서 중요성에 차이가 있다. 그만큼 당신에게 시간을 더 많이 쓰고 싶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럼 '밥 한번 먹어요=그럼 안녕. 볼 수 있음 또 보고 안되면 말고' 정도로 쓰는 나라는 인간이 '술 한잔해요'를 말한 모든 사람과 술을 마셨을까?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술 약속을 잡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러나 술 한잔 합시다라는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어디서라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나에게 이 말은 당신을 알아가고 싶다는, 평소에 겪는 생각이나 고민들을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그런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술 한잔 합시다! 오랜만에 외치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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