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진심인 편

뻔한 술 이야기 - 16

by 시그리드

스무 살 무렵부터 시작된 술에 대한 집착은 어느 시절에는 '광기'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취할 때까지 마셔야 했고, 물건을 잃어버려야 정신을 차리고 당분간 술을 멀리하는 것을 반복했으며, 즐기는 것도 모자라 만드는 것도 배우려고 기웃거렸다.

그렇다. 나는 술에 진심인 편이다.


술에 진심인 편

그러나 내가 명함도 못 내밀만큼 술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독일인들이었다.

몇 년 전, 독일에서 공부하던 동생을 보러 갔던 적이 있다. 운이 좋게도 동생의 독일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 이틀 정도를 머물 수 있었다. 그곳은 프랑크푸르트 근처에 폴다라는 작은 도시였다.


첫날 도착하자마자 동생 친구네 아빠가 주셨던 것은 거의 0.5L 정도의 유리병에 들어있는 맛있는 맥주였다. 그 맥주만을 위한 전용잔에 따라 주셨는데, 세로로 길쭉한 유리잔이었다. 와! 오자마자 술이라니 너무 좋다는 마음과 맥주마다 잔을 다르게 보관하고 있다니 이 정도면 펍 수준이군이라고 생각했다.


동생 말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은 지하에 창고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창고 안에 식료품 등을 보관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맥주라고. 친절한 산타할아버지 같은 인상의 아저씨가 주셨던 맥주도 그 지하실에서 꺼내 올라온 것이었다. 거대한 술 창고라니, 이 사람들 정말 진심이잖아...?


수줍음과 슈냅스 한잔

다음날에는 이 도시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맥주 브루어리를 갔다. 가을비가 와서 안개가 자욱히 낀 수도원 옆에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홀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흰색 500ml 사기 잔(투명한 유리컵이 아니었다)에 담겨있는 어두운 색깔의 맥주를 받았다. 흑맥주에 가까운 둔켈 종류였는데 미지근했다(원래 차갑게 먹지 않는다고한다). 독일 맥주 하면 시원한 필스너를 생각했는데, 묵직한 흑맥주라니 신기하기도 하고. 어찌 됐건 무척 맛이 있었다!


술꾼들로 가득 찬 가게 안은 바깥의 서늘한 공기와 반대로 열기가 가득 찼다. 취하는 것은 국적이 다르지 않아서 점점 기분이 업되고, 시끄러워지고. 당연하게도 현지인들이 주로 방문하는 그곳에서 외국인은 우리밖에 없었다. 대도시와 달리 우리를 자꾸 흘끗흘끗 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어린 동양 애들이 거대한 맥주를 들이켜는 게 신기했나? 여하튼 맥주가 맛있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두 잔 더 마시고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많아지는 변화를 느끼고 있던 찰나, 옆에 독일인 무리를 보니 그들도 한껏 취했는지, 얼굴이 벌게져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이 갑자기 주변 눈치를 살피더니, 품 속에서 투명색 액체가 들어있는 유리병을 몰래 꺼내는 것 아닌가. 그의 주머니는 헤르미온느의 것처럼, 귀엽게 생긴 소주잔 사이즈의 잔도 보관하고 있었는데, 품에서 꺼낸 잔에 술을 서로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아마 외부 음식물 반입이라서 눈치를 본 모양인데, 맥주도 마시고 싶고 다른 술도 마시고 싶은 그 마음이 좀 웃기고 귀여웠다. 그게 신기해서 쳐다보았는데, 그걸 본 친구네 아빠가 그들과 무슨 말인가를 했고, 어느새 합석하여 그들에게서 술을 얻어마시게 되었다.


슈냅스는 독일의 독한 증류주를 뜻했다. 30도가 넘어서 한 샷을 들이켜면 목이 타들어갈 것 같았지만, 헤이즐럿 향이 있어서 먹는데 더 달콤했다. 한 두잔 마시면서 느꼈다. 맥주랑 같이 먹으면 조화가 무척 좋았다. 맥주만 마시는 것보다 중간에 달달하고 민트향이 나는 뜨거운 술을 넣어주면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술 맛을 아는 자들이다. 리.스.펙.트.

꿀떡꿀떡 맛있다고 원샷 때려버리는 우리를 보며, 독일인들이 무척 흐뭇해하며 웃었는데 아까 멀리서 말도 못걸고 쳐다보기만 하던 낯 가리던 사람들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나중에 들으니, 그들이 품속에서 몰래 꺼낸 슈냅스 잔은 결혼식 때 손님들에게 나눠주는 기념품 같은 것이었다. 선물이 수건도 떡도 건강식품도 아닌 술잔이라는 것에 또 한 번 빵 터졌다. 정말 술에 진심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슈냅스로 하나가 되어 사진도 찍고, 즐거운 기억을 남겼다. 역시 수줍음을 마비시키는 데는 술만 한 게 없다. 역시 술꾼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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