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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Mar 22. 2022

퇴사 유전자

장투하듯 삽니다 - 1

퇴사하고 싶다는 말

"아 퇴사하고 싶다."

직장인이라면 입에 달고 사는 퇴사. 다음 거처를 정해놓지 않고 퇴사를 선언하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보장하는 통장에 매달 찍히는 숫자들을 무시하기란 어렵다. 애초에 어딘가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것도 두렵다. 회사 일이 힘들면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며, 사람이 너무 힘들면 커리어나 돈을 보고서라도 다니면 된다

고 생각하며 존버 한다.


그렇게 거의 약 8년 정도의 세월을 버텼다. 첫 직장에서 6년 6개월을 다녔고, 환승 이직한 다음 회사에서는 1년 반을 버텼다. 20대의 반절 이상을 첫 회사에 쏟았고 지금까지 보낸 30대의 시간들 중 대부분을 회사에 바쳤다. 회사 이름과 팀, 직책으로 나 스스로를 규정하는 게 익숙했고, 회사에서의 업무와 능력 같은 속성들 외에 '자연인' 나를 규정하는 건 언제부턴가 어려워졌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들여다볼 시간도 의지도 없었고, 모든 건 회사와 일 중심으로 돌아갔다. 출근하지 않을 때의 휴식 시간들도 사실상 회사에 잘 다니기 위한 충전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주말 중 최소 하루는 방전된 체력을 충전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했는데, 하루 종일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이 빈번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휴식시간이라기보다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시간들이었다.


퇴사를 하는 유전자는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작년 가을,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지금처럼 그냥 회사를 다닌다고 혹은 이직을 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것' 이라고는 전혀 없이 이리저리 쓰이는 그런 존재로 더 이상은 남고 싶지 않았다. 퇴사 유경험자 선배들에게 나의 고민들을 이야기했고, 그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들을 냉정하고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회사를 포기하지 말고 이직을 하라는 현실적인 조언도 있었고, 쉬어가는 것도 괜찮다는 토닥이는 답변도 있었다. 그러나 의견은 달랐을지라도 그들은 모두 같은 결론으로 끝을 냈다.

"네가 결정하는 것이면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그 진심 어린 말 한마디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고마웠고 큰 힘이 되었다. 나도 퇴사를 고민하고 있는 후배에게 마음속 깊이 공감하며 이야기해줄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퇴사를 하는 유전자는 따로 있는 줄 알았다. 나 같은 모범생 유전자에게 남들이 가는 일반적인 길을 포기할 용기는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건 없었다.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퇴사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당분간은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순진한 마음 덕분이었다. 나에게는 부양가족도 다달이 갚아나가야 하는 전세대출이나 주택담보대출도 없다. 만약 결혼하여 자식까지 있다면? 부동산 막차를 타고 수억을 빚을 내어 집을 샀다면? 아마도 더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난 내 몸뚱이 하나만 온전히 책임지면 된다. (이 점은 어찌 보면 굉장히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아무 데도 속하지 않은 자유인(a.k.a 백수)이 되었다.


자유인 고용계약서

오히려 일을 하고 있지 않으니, 매일매일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된다. 숨 막히는 지하철에 어떻게든 올라타서, 늦지 않게 출근을 하고,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일을 하고 돌아오는 그런 성실한 삶을 정말 정말 리스펙 한다.


퇴사를 하고 나니 크게 달라진 것은 출퇴근을 안 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내 선택에 달려있었다. 이런 넘치는 선택의 자유를 누렸던 적이 평생 있었던가? 처음엔 하루하루를 다르게 보냈다. 그동안 평일에 할 수 없었던 것들을 하고,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못 갔던 곳에 갔다. 매일매일이 새롭고 달랐다.

그러다가 점차 이런 넘치는 선택들이 조금 버겁게 느껴졌다. 전형적인 J인 나에게는 매일매일 새롭게 계획을 디테일하게 세워야 하거나, 혹은 아예 세우지 않는 것 모두가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차라리 루틴을 만들어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인 나는(그러나 저녁 11시만 되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아침 일찍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생활을 유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루틴들도 정했다. 오래 이 생활을 잘 유지하고 싶기에 자발적으로 정한 규칙이었다. 서류화 되지 않은 자유인 고용계약서 같은 것이랄까.


퇴사를 할 때 아쉬웠던 것은 똑똑하고 배울 점 많은 좋은 동료들과 더 이상 함께 지내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예전만큼 연락할 일도 없을 것이고 누군가는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퇴사를 하고 보니 이건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인연을 이어갈 동료들과는 오히려 더 부담 없이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더 이상 보지 않는 사람들과는 애초부터 그럴 사이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는 전 직장 혹은 전전 직장) 동료들을 만나면, 항상 듣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래서 뭐하고 지내? 좋아?"

나는 항상 이렇게 답한다.

"운동하면서 책 읽고 잘 먹고 잘 지내. 정말 좋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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