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그리드 Apr 22. 2022

그 망할 성취감

장투하듯 삽니다 - 13

일은 무엇이었을까?

일을 하면서 항상 고통스러웠던 건 아니다. 오히려 비중을 따지자면 재밌었던 때나 견딜만했던 쪽이 더 많았다. 다만, 해결이 어려운 고통이 반복되면 그게 터 크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을 찾는 그런 인간이었으므로 , 나를 믿어주는 동료들과 함께 주체적으로 일을 하는 것을 좋아했다. 똑같은 일을 뻔하게 반복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성취감도 얻을 수 있는 프로젝트를 하면서 성장하고, 회사에게도 득이 되는 그런 결과물을 만들기를 원했다.


첫 직장의 경우

영화 마케팅 일을 하다 보면, 텐트폴부터 작은 인디영화까지 담당하고는 한다.

예산이 큰 프로젝트는 필모에 당당한 흔적을 남길 수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입을 댄다. 관심도 많고, 이해관계자도 많고, 그래서 오히려 팀의 역할이 줄어든다. 리스크가 큰 새로운 아이디어는 시행하기 어렵고, 만약 한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설득 과정을 지나게 된다.

*보통 영화의 예산이 클 경우 영화 홍보마케팅 예산 즉, P&A(Print & Advertsing)의 예산도 더 커진다. 그렇다고 영화 예산과 P&A가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며 개봉 시기나 전략, 패키징에 따라 변하기도 하다. 정하는 기준은 각 회사마다 다르다.


이 때문에, 나는 오히려 큰 프로젝트보단 작은 프로젝트가 좋았다.

저예산 -> 이해 관계자가 적음 -> 회사에서 관심이 적음 -> 내가 주체적으로 할 가능성이 커짐

이런 논리인 것이다. 예산과 주체성은 반비례한다고 해야 할까? 콘텐츠 업계 특성상 애정과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편인데,  이런  '주체성' 은 작품에 대한 애정을 몇 배 더 심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마케팅의 장점은 비록 경력이 거의 없는 신입일지라도 관여할 수 있는 것들이 다른 팀보다 많다는 점이다. 보도자료에 들어가는 단어 하나, 모바일 광고 배너의 시안, 하다 못해 포스터의 질감까지도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 연차가 쌓이면서 전체 플래닝이나 큰 예산을 만지는 일을 맡게 되긴 하지만, 꼬꼬마 시절에도 '내가 한 것'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무척 재밌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기업 산하의 영화 투자배급사, 그 안에 마케팅팀의 일은 수많은 보고와 설득, 조율의 연속이다. 영화 하나를 개봉하기 위해서 보고 지옥이 펼쳐진다. 보고하고,  또 정리하고 보고하고 가 반복된다. 여느 대기업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저연차 때 느꼈던 자율성에 대한 기대가 깨지는 만큼 실망도 컸다.


연차가 올라가 PM이 되면 그 압박은 좀 더 강해진다. 영화의 흥망이 나의 목을 간당간당하게 할 정도로 위협하는 불안정한 조직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문제였을 뿐.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큰 장점일 수 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변하지 않는 조직에 대한 우려를 갖게 했다.


나의 경우 신입 때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많았던 것 같은데, 연차가 쌓이면서 그게 아닌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연차가 쌓이고 승진을 한다고(승진이 언제나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회사의 구조(대기업)와 업무(마케팅), 두 요인들로 인해 첫 직장을 떠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는 선후배들이 있고, 나는 언제나 그들을 응원하고 존경한다.



두 번째 직장의 경우

나는 한 곳의 스타트업만 다녔고, 각 회사마다 다를 수 있다. 엥 우리 회사는 아닌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나의 경험이 성급한 일반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인정하고자한다.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스타트업은 수평적인 구조로,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일을 해도 상관 없는 곳이다. 허례허식보다는 효율을 중시하는 그런 곳. 다녔던 회사 기준으로 어느 정도는 맞다.


개인에게 다양하고 많은 역량을 요구하고, 그만큼 개인은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게 된다. 스스로 일을 찾아 적극적으로 해야할 때가 많으며, 대기업처럼 업무분장이 확실하지 않아서 맡아야 하는 영역이 방대한 편이다. 좋게 말하면 그전에 하지 않았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많다는 뜻이다. 이 이유 때문에 보수적인 조직에서 스타트업으로 오는 경우를 많이 봤다.


상대적으로 수평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는 편이어서, 역시나 상대적으로 부서장이나 임원들이 권위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대표와 직접적으로 일하고, 필요하면 전화하고 DM 한다. (내게는 가장 센세이녈했던 부분)

타인과의 공유를 굉장히 중요시 생각하는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나 동료들도 알면 좋을 정보들을 공개 채널에 올리는 것을 미덕이라고 본다. 안 되는 것은 없고, 일단 되는 데까지는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또 같은 스타트업이더라도, 어느 투자 단계에 있는지, 대표가 어떤 철학이 있는지, 어떤 산업군인지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커리어의 성장 혹은 회사의 성장(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익들)을 보고 그 일을 선택했을 거라는 것이다.


그 망할 성취감

첫 직장에서 충족하지 못했던 것들은 두 번째 직장에서 어느 정도 채워졌다. 배울 점이 많은 동료들 사이에서 과거에는 가져보지 못한 권한을 가지고 일을 임하며, 때때로 성취감도 느꼈다. 내가 그렇게 부르짖었던 그 일말의 성. 취. 감. 말이다.


이직 후 일 년이 좀 지났을 때 주도적으로 맡았던 프로젝트가 끝이 났다. 그 뒤로 뭔가 텅 빈듯한 느낌이었다. 앞으로 그런 성과를 또 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예전엔 즐거웠던 새롭고 다양한 일들이 익숙해져 갔다. 어느 시점부터 납득되지 않는 일들도 쏟아내려 왔다. 일을 해내면 또 같은 일들이 주어졌다. 자잘한 일들이 많아지고, 의미 있다고 생각될법한 일은 망연해 보였다. 성장한다는 느낌이 없었다.

물론, 회사에서 원하면 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의 도리라는 건 머리로는 이해했다. 일을 1-2년 한 것도 아니고 언제까지 하고 싶은 일들만 하면서 살 수 있냐고 스스로에게 말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기회가 또 올 수도 있고. 기회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망할 성취감 때문이다. 이미 성취감을 보람을 그 쾌감을 알아버렸으므로, 납득이 불가능한 일을 반복하면서 몇 달을 몇 년을 더 보낼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했고, 윗사람들과 얘기하면서 더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이 포지션으로 회사에 남아있는 한 해결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라고.



대기업, 스타트업 두 조직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나'다.

 '어딜 가나 회사는 다 똑같다.'는 말은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 내가 어떻게 일을 받아들이느냐가 핵심이라의미로 이해하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회사에서 얻을 수 없다면,

회사가 원하는 것을 내가 줄 수 없다면,

결국엔 같다.



이전 03화 의미에 의미를 둔 퇴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