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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Apr 25. 2022

모든 관계엔 거리가 필요하다

장투하듯 삽니다 - 14

잘하고 싶어

잘하고 싶은 마음이 문제였다.


자기 몫을 잘하는 사람,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다른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수많은 반면교사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 정도 연차인데도 저렇게 밖에 못하지?' '또 누락이야?' '저 자리까지 어떻게 올라간 거야? ㅉㅉㅉ' 라면서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매일매일 다짐했다.

나는 아닐 거야.

떻게든 잘 해내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어느 시점인가는 일의 성과가 내 존재의 성패와 동일해지기도 했다. 일과 내 삶을 일치시키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업계의 특성상 일과 삶의 교집합이 매우 큰 편이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그런 감각들을 가지고 일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분야에서 일을 하는 거니까,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주 화가 났고, 슬퍼졌고, 또 한순간에 기쁘기도 했다.


애초에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일으로서만 영화를 대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특히, 일을 깔끔하게 하던 한 과장님은 영화에 대해서 애정이 없어 보였다. 그분에게는 영화라는 자리를 다른 어떤 제품으로 바꿔도 똑같을 것 같았다. 솔직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태도로 일을 할 수가 있지? 너무 재미가 없지 않나 생각했다. (여전히 재미를 쫒던 아가 시절...)


회사는 내 자체, 회사의 일은 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외부에 나가면 꿀리지 않은 간판이 되는 회사를 뿌듯해하기도, 잘하고 싶은데 도와주지 않는 것 같은 회사를 미워하기도 했다. 어느 시점엔가는 회사와의 관계는 애증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관계엔 거리가 필요하다

4년 차가 되던 가을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좋아했고, 훌륭했던 영화가 생각보다 흥행하지 못하자 온전히 마케팅 담당인 내 잘못인 것 같았다. 영화를 살리기 위해 뛰어다녔고, 배급팀에게 가서 우리 영화 좀 살려내라며 읍소하기도 했고(배급팀의 상영관 확보가 중요하다). 선후배들이 고생했다고 칭찬해줬지만, 결국 입안이 헐고 병이 났다. 지독한 감기몸살은 한참을 갔다. 영화와 나와의 거리를 두지 않은 탓이다.

그때야 알았다. 일을 나로서 증명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일과 삶이 분리된 그 과장님이야말로, 오히려 가장 현명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커리어를 위해, 도퇘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이직을 했다.

이직을 하고 나서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더 큰 압박에 시달렸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월급만큼의 가치를 증명하는지 고민했다. 분기별로 진행되는 피어 피드백은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로서의 증명이자 부담으로 다가왔다. 또다시 증명의 늪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퇴사를 했다.


일에 잡아 먹히지 말 것

지금에야 생각해보면, 앞서 언급한 일잘러가 아닌 동료들을 부적응자라고 칭하며 나는 그들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할 자격이 었는지 의문이다.

애초에 한국 조직들은 사회의 요구를 잘 따라온 '모범생' 출신 직원들에게 적합한 구조다. 여전히 기업들이 직원을 뽑을 때 학벌과 학점에 집착하는 것도 그 맥락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9-6시의 규칙적인 생활을 끈기 있게 잘 버텨낸 '순종적이고 부려먹기 좋은' 구직자라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에 나와보면, 학벌이 좋다고 학점이 좋다고 일을 잘하는 건 또 아니다.)


그 일을 못하더라도 다른 일에는 재능이 있을 수도 있다. 특정 일을 잘 해내지 못하는 것이 온전히 그 사람 잘못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예 일할 의지가 없고, 교묘하게 일을 미루거나 이기적인 것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지만.)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되었다.

일에 잡아 먹히지 말아야 한다는 것. 특정 조직에서 일을 잘 해냈다고 오만하지도 말 것. 일은 나에게 금전적인 이익을 주고 보람을 느끼게 해 주며 나를 구성하게 하는 일부이지만, 나의 본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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