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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그리드 Apr 12. 2022

의미에 의미를 둔 퇴사

장투하듯 삽니다 - 7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퇴사를 한 이유는 명료했다. 입사 한 뒤로 1년 반 동안 많은 일들을 했지만, 정확히 당신은 어떤 일을 하는지 물어본다면 답할 수 없었다. 대표와 동료들로부터 인정 받지 않은 것은 아니나, 스스로 내 역할과 일을 납득할 수 없는 환멸 주간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과거 이직하기 전을 떠올려 보았을 때 환멸 주간이 반복될 경우 그건 곧 회사를 떠나라는 신호다. 그리고 나는 '숨이 남아 있을 때' 올라오는 것을 택했다.


결혼과 퇴사의 공통점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왠지 결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상대는 정해져있다고 한다. 전에 만났던 사람과 얼마나 긴 연애를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한두 달 만나고 결혼하는 사례가 존재하는 이유다. 잘은 모르지만, 딱 그럴 것 같은 순간. 지금이다 라는 느낌.

퇴사도 비슷하다. "때려치우고 싶다" "퇴사하고 싶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회사를 다녀도, 실상 회사를 그만두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퇴사하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것, 또 그 이야기를 같이 나누며 이야기할 동료가 있다는 것은 그만큼 회사를 다닐 에너지와 동기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정말 퇴사를 할 때가 오면 , 조용히 스스로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그리고 '지금이다' 리는 확신이 들게 되고, 면담으로 직진하게 된다. 나의 경우는 그러했다.

퇴사를 결심하는 과정에서는 몇몇 회사 내외의 퇴사 선배들과 면담을 하긴 했으나, 회사가 힘들다며 징징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의 상황과 결심에 대해서 한번 더 확인받고 싶어서였다. 사실상, 답정너였기도 했고.



큰 꿈을 꾸었다

한국 영화계의 100인이 되자.

지금 보면 웃음만 나오는 유치했던 스물다섯 살 무렵 신입사원 때의 다짐이다.

이 문장을 회사에서 나눠준 첫 업무 노트에 적어두고 매일매일 보았다. 어디든 항상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 윗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 선배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투두 리스트를 작성했으므로 하루 종일 가장 자주 많이 보는 곳이라 생각하고 적어두었던 거다. 대체 어떤 식으로 어떤 기준에 의해 100인이 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하여간 패기 하나는 넘쳤다.


가장 좋아했던 것을 일로 할 수 있다니!  처음에는 꿈같았다. 모든 것들이 재밌었다, 내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에 가슴이 뛰었다. 내가 감히 여기에 들어가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고. 첫 영화 크레디트에 들어가는 내 이름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극장에 가서 끝까지 앉아있기도 했다.


영화 마케팅은 개봉 전 1-2달 전부터 개봉 후 1-2주까지 바쁜 일들이 이어진다. 일이 한 번에 몰렸다가, 쑥 빠지는 주기가 있는 일이었다. 처리해야 하는 수백 통의 메일은 숨이 턱턱 막혔고,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일을 한 번에 쳐내야 했으므로 멀티태스킹이 기본이었다. 처음엔 정말 너무 어려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재밌었다. 내가 생각한 작은 카피 하나가, 내가 선택한 광고가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화일이었으니까. 몇 편의 영화를 마케팅하고 일이 익어갈 즈음부터 앞으로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했다. 콘텐츠업은 좋았지만 마케팅이라는 업무가 나와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며 몇 년이 더 흘렀다.


사실 투자배급사 직원은 영화인이라기보다는 영화를 다루는 대기업 계열사의 회사원에 가까웠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필요한 역량은 '조율하는 능력'이었다. 코로나로 시작된 영화업계의 위축은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만들었고, 원하던 대로 직무와 분야를 조금 틀어서 이직을 할 수 있었다.



의미에 의미를 둔 퇴사

그렇게 이직한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했다. 명확하게 업무가 정해진 대기업과 달리, 필드에 구애받지 지 않고 업무를 맡았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자극을 주는 똑똑한 동료들과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러나 1년이 지났을 무렵 내 역할은 무엇인가? 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전 회사에서처럼 나는 여전히 '조율하는 업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들'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들이 나온다.


소모되는 부속 취급을 받을 때 사람은 동기 저해의 늪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보통 보상을 많이 할수록 더 많은 성과가 나올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이 보상만으로 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전통적인 방식으로 돈을 보상받은 집단은 오히려 더 낮은 생산성을 보였다… 사람들에게 일이란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 그 이상임을 이해할 수 있다.  

직원들이 그들의 일에 대해 더 깊은 의미와 관심을 쏟으며 서로 연대감을 느낄 때, 고용주와 직원들 모두 일의 완성도와 생산량이라는 실질적인 혜택을 얻게 된다


결국 ‘의미’의 문제였다. 나는 모든 프로젝트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정확하게 내 일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다. 나의 역할은 그때그때의 필요에 의해서 변했다.  매일 소모되는 느낌이었다. 나만의 것, 내 것이 없었다.

이것은 당장 이직 준비를 해서 회사를 바꾼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4차에 걸친 퇴사 면담은 지치게 만들었지만, 오히려 점점 명확해졌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스스로 퇴사를 결심한 이유를 언어화시킬 수 있었다.

회사는 금전적인 보상(만약 일확천금 수준이었다면? 그렇다면 또 달라졌을지도 하하)과 앞으로의 리더(나는 관리자가 되고 싶다고 한적이 없다)자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런 것들은 회사에 남을 이유가 되지 않았다. 생각보다도 나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이 중요한 사람이었던 거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로부터 그것을 전혀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회사가   있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전혀 달랐으므로, 성립될  없는 협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도비 이즈 프리를 주구장장 외치며, 백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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