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처음이 누나 Aug 23. 2018

처음이의 마음 한구석에 초코가 살고 있었다

처음에 관하여

  

  처음아! 최처음! 애타게 불러도 처음인 자신의 이름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부답이다. 그저 꼬리를 살랑거리며 숨을만한 곳을 찾아, 파고들기에 알맞은 비좁은 구석을 찾아, 집안을 살피며 어슬렁거릴 뿐이다. 처음이는 자기 이름은 몰라도... 현관문 도어락 비번을 누르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띠띠디디’ 알림음만 울리면 문 앞으로 향한다. 그리고 마치 오랫동안 너를 기다려왔노라 말하듯 애처로운 눈빛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식구들을 성실하게 맞이한다. 본인이 숙면에 빠져있을 경우를 제외하곤.



  별다른 협의가 없었음에도 처음이와 관련한 호칭은 자연스레 정리가 되었다. 나름 늦둥이인 덕분에 이십 여 년 간 ‘애기’ 호칭을 들어온 우리 집 인간 막내는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 순순히 처음이에게 막내자리를 양보했다. 엄마는 한동안 처음이만 보면 자식을 보낸 어미가 짠하다, 어미랑 떨어진 어린 것이 짠하다, 처음이의 거친 털이 짠하다, 그렇게 동정 가득히 처음이를 짠하게 바라보다 처음이의 엄마가 되.었.다. 물론 나도 엄마 호칭을 맡아도 여러가지로 어색하지 않은 조건이지만... 기꺼이 누나1을 맡았다.



누나2 품 안에서_다소곳 처음



  우리 중 아빠만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처음이를 향한 사랑은 커밍아웃했지만, 차마 호칭만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고양이의 아빠가 되는 것, 상상도 해보지 않았으리라. 그런 아빠가 귀여워, ‘아빠가 처음이 아빠야?’ 라고 짓궂게 물으면 아빠는 화제를 돌리거나 대답을 피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말하고, 처음이는 듣기만 하는 일방적인 대화를 듣고야 말았다. 아빠는 똑똑히 ‘처음아 아빠는’, ‘처음아 아빠가’라며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둘의 대화는 자상하고 다정했다. 요즘 흔한 말로 스윗했다.






  ‘띠띠디디’ 외에는 반응이 없던 처음이의 반응을 이끌어낸 다른 한 가지는 초코(처음이 친모)의 목소리였다. 핸드폰 속 영상을 넘기다보니 처음이를 포함한 다섯 아이들이 초코에게 딱 붙어 꼬물대고 있었다. 다섯 아이들은 아직 걷는 것도 서툴어 보였고, 바닥을 걷기 보단 처음으로 스케이트를 탈 때처럼 바닥에 열심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안의 작지만 희미한 초코의 목소리가 핸드폰 밖으로 흘러나오자, 그 순간! 곤히 잠자고 있던 처음이가 일어났다. 처음이의 귀는 쫑긋거렸고, 몸을 곧추 세웠고, 두리번거렸다. 과연 처음이는 무엇을 찾은 걸까?



우아한 초코



  대견함을 넘어서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와의 생활에 익숙해진 줄 알았던 처음이다. 고양이의 언어에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기억 속 엄마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처음이의 마음 한구석에 초코가 살고 있었다. 처음이가 짠해 어찌할 줄 모르겠으면서도 한편으론 이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이 어린 것의 마음을 시험하다니 난 참 사.악.하다. 식구들 앞에서 제법 긴장하며 동영상을 재생시키고 처음이의 반응을 살폈다. 허나 전과 같이 극적이지 않다. 반응이 약하다. 한 번만 더! 이번엔 완전한 무반응이다. 처음아... 그새 잊은 거니, 그런 거니... (그래도 누난 쫑긋하던 너의 슬픈 귀를 잊지 않을 거야. 고양이 엄마, 형제들과 떨어져 우리에게 와준 너의 삶을 소중히 여길 거야.)  




이전 07화 말없이 투정을 들어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