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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idaCoreana Sep 17. 2018

나는 역시 한국인이구나...

스페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기 #06 문화 차이 - 속도

스페인에서 오래 살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느긋함이다. 지금도 배우고 있는 중이고... 좋게 말하면 느긋함이고 나쁘게 말하면 게으름이다. 스페인에 와서 일상에서, 그리고 일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Mañana(내일)"이거나 "Esperate(기다려)"였다. 그 두 단어 때문에 나는 문화 차이를 경험했고, 난 아직 한국인이구나를 다시 느끼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살만큼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직장 생활 한 3년 차쯤 되었을 때는 나는 이제 스페인 사람들의 느긋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다. 레스토랑에서 웨이터가 주문받으러 올 때까지 그들을 부르지 않고 기다린다거나, 회사에서 매일 이메일 답장을 재촉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나를 보면서 이제 나도 익숙함을 넘어 이들의 느긋함을 즐긴다고 생각했다. 


'아! 나도 이제 스페인 사람 다 됐구나!' 


하. 지. 만. 그건 착각이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토종 한국 음식을 먹으면서 30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 성격이 스페인에서 몇 년 살았다고 바뀔 리 없었다. 


언제까지 내일 할게라고만 할 거니?


스페인의 징검다리 연휴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4일을 쉰다는 생각에 들떠 있을 때 시스템 상에 문제가 발생했다. 일종의 버그였는데 하필이면 그게 아시아 시장에 큰 영향을 주는 버그였고 당장 고치지 않으면 아시아에서 콜이 연휴 내내 이어질 걸 알기에 기술팀으로 급하게 연락했다.


그런데 기술팀의 대답이 지금은 퇴근 직전이라서 고칠 수 없고 월요일 출근 후에 살펴본다고 했다.(이번엔 그들이 습관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일 할게라고는 안 했다... 그렇지 내일은 연휴니까... 다만 그들의 대답은 더 늦은 그다음 주일뿐이었다...)


내가 급하게 연락을 한 것은 연휴 동안 발생할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한 것인데 연휴가 지난 월요일에 고쳐서 어쩌자는 건지... 화가 났다. 일전에도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음에도 그들은 전혀 배운 게 없구나, 그리고 이들은 아시아도 그들의 시장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아시아라는 시장의 특성을 모르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선에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팀장을 찾아갔다. 



나: "시간 있니?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해"

팀장: "급한 일이야? 말해봐"

나: "버그가 생겨서 담당팀에 연락을 했는데 월요일날 고친데... 오늘부터 4일 동안 이 버그를 그대로 가지고 가야 한다는 말이야... 아시아 시장에 문제가 생길 거야. 이건 꼭 오늘 퇴근 전에 고쳐야 해!"

팀장: "알았어 내가 연락해 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팀장이 연락이 왔다. 그쪽에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월요일에 고치면 안 되겠냐고. 대부분이 이른 퇴근을 해서 백업이 없다고... 이런 대답이 올 거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상상하고 팀장을 찾아간 거지만 어떻게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건지...


일단 나는 다시 팀장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흥분한 상태에서 이 심각하지 않은 버그가 발생시킬 일련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일전에도 주말에 버그가 발생해서 웹 페이지가 제대로 작동을 안 했고 그 주말 동안 얼마나 많은 클레임을 받았는지 기억하냐고, 이번은 더 심할 거라고 구구 절절 왜 즉시 고쳐야 하는지 유럽과 아시아 시장의 차이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마쳤을 때 팀장은 다시 기술팀에 연락해서 오늘 중으로 고칠 수 있도록 압박하겠다고 했다. 그때 그녀의 얼굴은 내게 좀 질린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나는 아마도 빨간 천으로 달려드는 투우 소 같았을 것이다. 왜 빨리 처리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느긋하게 구는 그들에게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에...


우리 팀장, 아시아 현지 담당들 등 전방위로 압박한 결과 기술팀에서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주 월요일이나 되어야 고쳐진다던 그 버그는 다음 주가 아닌 그날 저녁쯤 해결이 되었다. 다행히 우리는 연휴를 조용하게 아무런 문제가 없게 보낼 수 있었다. (아마 기술팀에서 내 욕을 연휴 동안 많이 하지 않았을까...)



모든 게 잘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퇴근을 하고 오는 길에도 하루 동안 화가 났던 감정의 찌꺼기들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집에 오는 길에 친구랑 통화를 하면서 그 날일을 다시 한번 더 곱씹었고 그건 결국 스페인에 대한 불평으로 이어졌다.


"당장 고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월요일까지 기다리라고 할 수가 있지? 할 생각이라도 한 번 해봤을까? 자기 일에 책임감이 없어 책임이!"

"스페인 사람들은 왜 이렇게 게으르지? 느려 터졌어! 허구한 날 내일 할게라고만 해!!" 

"어떻게 기술 팀이 연휴에 백업 없이 쉴 수가 있지 명색의 이 커머스 기업인데!" "Bla bla bla"


그렇게 한참을 한풀이하듯 열을 내던 내게 친구가 한마디 했다. 


"넌 역시 한국인이구나, 난 너.. 스페인 살면서 변한 줄 알았는데 아니네"


친구의 말에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랬다. 난 느린 것도 미덕이라면서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척 가면을 쓰고 스페인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노동자일 뿐이지 느긋함을 태어날 때부터 실천? 해 온 스페인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많은 것들이 빨리빨리 처리가 되어야 하고, 내일이 연휴던, 휴가던 상관없이 내게 책임지어진 일이면 끝내고 가야 하고, 느긋함은 DNA에 장착되어 있지 않은 한국인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내 주관적인 기준에서 말하는 것이지 모든 한국인이 이렇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스페인의 많은 것들을 좋아한다. 열정적임, 너그러움, 워라벨을 지키며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그들의 여유까지, 하지만 아주 가끔은 많은 것들이 빠르게 처리되고 기다릴 필요 없었던 한국이 그립기도 하다. 


by. 라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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