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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idaCoreana Oct 23. 2018

예의를 차리면 발언권이 사라진다.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기 #12 예의와 무례의 중간

좀 올드해 보일 수도 있지만 나는 토론형 교육보다는 주입형 교육을 받은 세대이다. 학창 시절 토론이라는 것을 하기는 했지만 순서를 정해서 하는 보여주기 식의 토론만을 했었었다. 그런 나에게 발언권이 정해져 있지 않는 이 곳에서의 토론과 회의는 새로운 세계였고 그것에 적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끼어들어도 되는 거야?


학창 시절 나는 다른 사람이 말할 때 끼어들거나 말을 자르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라고 배웠다. 타인의 말을 경청한 후, 그에 대한 의견을 말하는 것이 토론의 기본이고 예의 있는 것이라고 배웠던 내게 스페인에서의 회의와 토론은 가히 충격이었다. 


한 사람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다른 사람이 말을 자르면서 의견을 피력하고, 또 그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어 의견을 이야기한다. 저 사람 발언만 끝이 나면 내 의견을 이야기해야지 하다 보면 내가 미처 말하기도 전에 그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지나가 버린다. 


처음에는 수시로 끼어들거나 말을 자르는 상황들을 보면서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이것이 무례나 예의 없음이 아니라 토론이었고, 회의였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익숙해져야할 문화이기도 했다.


치열하기 그지없는 이런 상황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결국 회의에서 한 마디도 못하고 회의실을 나오는 경우가 다수 발생한다. 다음에는 나도 꼭 내 의견을 말해야지 다짐을 하고 또 다른 회의에 들어가지만 아직 인식의 전환을 완전히 하지 못한 나에게 끼어들기는 여전히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였다. 


결국 남의 말을 끊는 것은 왠지 모르게 무례하게 느껴지고, 익숙하지 않아서 다른 팀원들의 의견을 들으며 타이밍만 찾다가 회의실을 나오며 자괴감을 느끼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서 팀원들에게 나는 점점 '조용한 사람'으로 인식이 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나 나름대로 회의가 무섭고 두려워서 가기가 싫었다. 보다 못한 팀장이 가끔 회의 중간중간 나의 의견을 물어 줄 때가 있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런 식으로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 같이 일하던 외국 친구에게 SOS를 청했고 그 친구가 가르쳐 준 노하우와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금씩 상황을 바꿔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정설이 아니라 나만의 극복 방법이기에 혹시라도 무작정 따라 하는 일은 없기를...)




첫째 예의와 배려하는 마음을 잠시 내려두기.

끼어들기가 익숙해질 때까지는 다른 사람에 대한 예의와 배려를 잠시 치워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화를 내면서 끼어들지 않는다면 무례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두려워하지 말아야 했다. 그래서 나도 이 타이밍에 끼어들어도 될까 말까, 무례하지 않을까를 고민하기 전에 먼저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그렇게 하다 보니 다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점차 자신감이 생겨서 조금씩 끼어들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어색하지 않게 끼어들 수 있는 추임새 단어들을 연습하기

A ver, Oye, Mira, Entonces (그냥 별 의미 없이, 이봐, 봐봐, 그러니까 등의 말 들이다.) 등이 단어들을 입에 착착 붙도록 연습하고 일반적인 말하기에도 많이 쓰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수시로 저 말들을 중얼거렸었다. 그리고는 일단 할 말이 생각나면 무조건 저 단어들부터 내뱉고 보았다. 가끔 적절하지 않게 말을 자르는 부작용?도 발생했지만 저 단어들 덕분에 말할 기회를 좀 더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셋째, 접속사 혹은 말이 끝나가는 타이밍을 노리기.

말을 빨리하고, 잘 끼어들고, 잘 자르는 스페인 사람들이지만 그들도 '그래서', '그런데', '하지만' 등등의 접속사를 쓰기도 하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 쉬는 타이밍도 있다. 그리고 잘 듣다 보면 주제에서 조금 벗어난 부분으로 문장이 흘러가면서 의견이 끝이 보일 때도 있다. 그럴 때 그 부분을 적절하게 잘 노리면 자연스러운 끼어들기가 가능하고 발언권을 좀 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모든 회의가 다 저렇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고, 회의의 성격, 참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끼어들기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례로 아시아 팀과 회의를 할 때는 회의를 주제하는 사람이 돌아가면서 발언할 기회를 주기 때문에 끼어들기를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이 많은 회의라면 회의를 진행하는 진행자가 없을 것이고 순서 없이 끼어들고 말을 자르며 회의가 진행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의와 배려보다는 적절하게 끼어들 타이밍을 잘 찾아야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


일상적으로 스페인어를 쓴다고 하지만 모국어가 아닌 말로 적재적소에 끼어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예의와 배려, 경청의 중요성을 주입받으면서 커온 한국인이기에 스페인에서 직장 생활을 5년 넘게 했지만 아직까지도 말하는 도중 끼어들기는 힘들 때가 있다. 


하지만 스페인에 왔으면 스페인의 법을 따르고 스페인의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회의를 들어가면 적재적소에 타이밍 적절하게 끼어들기 위해 노력한다. 



by. 라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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