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노보'는 아프리카 콩고강 남쪽 분포 종으로, 침팬지 속에 속하는 동물 중 하나인 피그미 침팬지라고도 한다. 침팬지와는 생김새가 거의 비슷하여 구분이 어렵다. 생긴것은 비슷하지만 이 두 종의 사회는 다른 점이 많다. 침팬지의 공격성은 관찰하기 쉬우나 보노보의 공격성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침팬지는 다른 무리의 침팬지 수컷을 죽이고 그 집단의 암컷을 '차지한다'. 침팬지는 똑똑하지만 서로 협력하고 소통하는 능력은 보노보에 비해 낮다. 침팬지는 정치적 행동도 하는데, 수컷들이 서열과 파벌을 나누고, 그중 하나가 우두머리가 되면 모두 복종한다. 서열에 따른 차이는 암컷에게도 나타난다. 암컷 침팬지 중 서열이 높은 침팬지는 열매를 먹기 가장 좋은 자리에 있고, 서열이 낮을수록 외부공격에 위험한 곳에 위치한다. 이런 사례를 보면 사람과 가까운 동물인 만큼 인간의 이기심이라던가 폭력성을 연구하는데 침팬지만 한 동물이 없을지도 모른다.
반면 보노보는 다정한 존재의 대명사다. 보노보 또한 침팬지와 마찬가지로 사람에 가장 근접한 동물이다. 똑똑하고 주위 보노보와 유대를 잘 맺기에 사회적이다. 이런 모습을 보아 사람과 비슷하지만 사람이 가진 폭력적인 모습은 보기 어렵다. 온순하며 평화를 중시하는데, 대표적인 평화방법에는 성행위가 있다. 성행위를 통해 서로 유대를 높이거나 갈등을 해소한다. 동성끼리도 하며, 먹을 것을 받고 성행위하는 모습도 보인다. 침팬지는 다른 무리와 대립이 생기면 다른 야생의 동물들처럼 전투에 임한다. 하지만 보노보는 다른 무리의 보노보에게 폭력을 보이는 일이 드물다. 다른 무리를 죽이는 모습은 발견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들과 먹이를 나눈다. 보노보는 다른 무리와도 유대한다.
보노보는 모성애도 강하여 어떤 이유로 고아가 된 새끼를 주워 친자식처럼 키우는 보노보도 있다. 다정한 생물인 보노보는 같은 종에게만 따뜻하게 대하지 않는다. 영국 크위크로스 동물원에 살던 보노보 '쿠니'는 유리찰에 부딪쳐 다친 새를 보고 높은 나무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 새의 날개를 펴서 우리 밖으로 날려 보냈다. 쿠니의 일화를 보면 보노보는 다른 종에게도 측은지심을 가진 듯하다.
보노보를 무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유인원의 친척 가운데, 오직 보노보만이 우리를 괴롭혀온 치명적인 폭력성에서 벗어난 종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 탁월한 지능과 지성을 뽐내는 인간이 하지 못한 것을 보노보가 성취한 것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중에서
보노보는 조건 없는 친화력을 가졌음을 알 수 있지만, 조건 없는 친화력은 오히려 독이다. 무조건의 친화는 자기를 위협하는 악에게 대응할 방도 없이 속수무책이다. 다행히 보노보는 그만큼 치우쳐 있지 않았다. 그토록 다정했던 보노보도 자기 가족이 위협을 받으면 매서운 이빨을 드러낸다. 오랫동안 보노보를 지켜본 사람이 이빨을 드러낸 보노보를 처음 본다면 꽤 당황할 것이다. 마치 내가 전부인 것 같던 반려견이 먹을 것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보는 것처럼말이다. 하지만 보노보와 반려견의 이빨이 그들의 다정함을 배반했다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위협이 사라지면 이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다가올 보노보와 반려견이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을 읽으면 다정함이 어떻게 종의 종속에 힘이 되는지 말한다. 그렇다면 모든 종의 정점에 군림한 인간의 역사는 왜 그리도 사악할까. 산림을 파괴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같은 종끼리 노예를 삼는 게 인간이다. 다정한 것은 살아남는데 도움 되기보다 이용당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그런 반면에 타인을 위해 힘쓰는 존재들도 보인다. 쉬는 날만되면 봉사 나가는 사람,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이를 위해 후원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인간사회에서 누군가는 폭력을 행사하지만, 누군가는 온화함을 보여준다. 인간은 다른 종보다 사악하며, 어느 종보다 의롭다
이처럼 인간사회는 정반대로 보이는 선한 행동과 악한행동이 모두 일어난다. 사회적인 시각뿐만 아니라 인간개인에게도 정반대의 행동이 드러난다. 사상 최악의 전쟁 범죄자였던 히틀러는 자신의 반려견을 사랑한 동물학대 혐오자였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조용한 모범수였다. 30년 동안 발달장애를 자식을 정성스럽게 키운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죽인 최근 뉴스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적이 있다. (이들을 같은 선상에 비교하고, 착한 면모가 있었기에 정상 참작해야 된다 주장하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폭력과 애틋함은 미묘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고, 모든 개개인은 지킬 앤 하이드의 면모를 지녔다
언제부터 나는 '다정'을 친절과 분리해 왔다.내게 다정은 친절이 아니라 多情이다.多情의 의미로 볼 때인간만큼 다정한 존재가 있을까. 감정에 무수히 많은 단어로 이름 짓는다. 그것도 모자라 문장을 지어 감정을 느낀다. 더 나아가 감정에 서사를 부여 이야기에 몰두하게 만든다. 그만큼 지구에서 인간보다 많은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인간이야말로 가장 다정한 종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다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친절이 아니라 '다양한 감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정함'이란 수많은 감정을 이해하는 것이며 '다정한 존재'는 많은 감정을 느끼고 이해하는 다양한 감정의 집합체다. 그렇기에 다정은 친절을 베푸는 선의의 감정도 있지만, 폭력을 행하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도 있다. 인간은 수많은 감정의 집합체다.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종보다 잔인할 수 있고, 다른 종에게도 친절해질 수 있는게 아닐까.
나는 정의감이 넘치는 사람도 아니고, 매번 선한 행동을 할 위인은 전혀 안된다. 부끄러울만큼 시기, 질투, 분노, 혐오를 자주 느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듯하다. 그럼에도 다정하고는 싶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분노나 혐오와 같은 부정적 에너지에 휩싸인 나를 발견할때, 이 감정이 더 커지지 않도록 경계할 뿐이다. 이것이 나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일부분이고, 외면할 수 없는 나의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