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내가 숲 속으로 온 것은 신중하게 살고 싶어서다. 인생의 본질 하고만 부닥치고 싶어서”라 했다. 그래 ‘신중’과 ‘본질’은 삶을 견인牽引하는 데 참 요긴한 레시피다. 이 둘이 빠진 인생은 명품 흉내를 내는 짝퉁이다. 내가 웃는 이유를 따져보는 까닭 또한 나도 신중하게 살고 싶고 인생의 본질과 조우하고 싶어서다.
월든 호수 숲에 가지 않아도 우린 숲을 만난다.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마음 내어 준 가족과 이웃. 하늘 여행길에서 어미의 모든 동선을 내려다보고 있을 아이의 눈. 고단한 삶에 든 내면이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으려 기氣 쓰는 나의 자아. 이 모든 것들이 내겐 다 숨을 쉬게 하는 숲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민낯을 대면하는 곳, 그곳이 곧 신중과 본질에 부닥치는 사람들이 서있는 사람의 숲이다.
내 시련의 때에 손잡아 준 사람들이 숲처럼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웃으려 애를 쓰고, 천국의 아이가 보고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이를 드러내어 하늘을 향해 웃어보며, 아이를 그리는 그리움을 다 그리지 못하여 나 스스로 우울하지 않아야 하기에 나는 웃는다. 그러고 보면 이들은 내게 웃음기를 공급하는 웃음의 숲이다. 찐득하고 보들보들한 송편 반죽처럼 희고 찰진 웃음을 새어 나오게 하는 내 삶의 산소 공급처, 숲이다.
스물 두해하고 여섯 달 닷새.
내 뱃속에서 열 달.
막내는 그만큼의 나이까지 나에게 기쁨만을 안겨주었는데…, 어느 날 잠자다가 홀연히 천국 여행을 떠났다. 막내가 떠난 지 몇 해를 다 보내고 또 다른 한해를 맞았는데, 그 날수日數만큼이나 점점 긴 그리움의 그림자가 내 안에 그려진다. 그리움을 참으려 하면 할수록 더 어른거린다.
하여 운명으로 꼭 품는다.
그러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마음을 하늘이나 바다처럼 드넓게 먹으면.
내가 웃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두 딸이 있어서다.
시드니에서 회계사로 일을 하는 큰딸은 막내를 보낸 후부터 매일 매시간 어미의 안부를 챙긴다. “엄마, 오늘은 뭐해?” “엄마, 밥 먹었어?” “뭐하고 먹었어?” “엄마, 주말에 어디 좋은 데 가볼까?” 하며 카톡을 카톡 카톡 띄운다.
또 막내가 떠나던 날, 그날 하필이면 약국 인턴을 해서 받은 텍스 리턴이 들어왔는데, 그 귀한 $2500(250만 원 정도)을 어미에게 몽땅 안겨준 작은딸이 곁에 있다. 그땐 지 용돈도 쪼개어가며 쓸 때인 걸 어미가 다 아는데.
이토록 지극한 두 딸들 때문에도, 짚불처럼 사그라드는 웃음기를, 꺼져가는 불씨인 양 다독인다.
그리고 대학 3학년 졸업반이던 막내, 내 아들의 골분함을 아무 말 없이 그저 뜨거운 눈물로 감싸 안으며 받아 들고, 따스한 국밥을 차려주던 고국의 가족이 있어 나는 웃는다. 막내를 보낸 후 거칠고 황량해진 내 안의 바람을, 어릴 적 둔덕에서 만났던 노랗고 찐한 애기똥풀의 색깔과 향기로 바꿔준 그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분명 웃음을 잃었을 게다.
얼마 전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내가 사는 이곳 번다버그까지, 벗의 팔순 모친이 보내오신 소포를 받았다. 꽃 편지지에다 꽃 누름을 장식하여 당신의 꽃 마음을 다정 다정 눌러써 담고, 몇 년 전 따님을 보낸 이어령 선생의 『굿 나잇 키스』라는 서책까지 동봉한, 시인이기도 한 당신의 기품 어린 깊이 앞에서도, 나는 통곡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해맑은 꽃 편지처럼 웃는다.
인정 어린 사람의 숲에서 살아난 나는 사람의 웃음을 되찾아 간다. 이 웃음은 내 것만이 아니다. 또 다른 누군가의 웃음을 되살려낼 내가 사람 숲으로부터 받은 숲의 웃음이기에, 나도 이젠 어느 아파하는 숲의 자리를 살펴, 한줄기 미풍으로 다가갈 숲의 손이 되길 희원한다. 내가 기어이 일어나서 웃으며 사는 걸 보고, 미지의 그 누군가도 그렇게 웃으면 좋겠다.
다 같이 웃는 웃음 숲이 되면 좋겠다.
* 감사합니다. 본 브런치 북은 <잊는 데 늦는 건 없어 2>와 연계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