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제임스 러부룩이 쓴 『가이아』의 맨 앞 장엔
“아름다움은 진실이며,
진실은 아름답다. 이것이 전부다”
라는 말이 나온다.
나는 이 글귀를 읽을 때면 ㅅ언니를 떠올린다.
2007년도에 처음 브리즈번에 오고 나서 나는 그 언니와 시간의 한 덩어리 속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언닌 나보다 다섯 살 많다.
8년이 되도록 같은 교회를 다녔고 같은 구역 식구가 되었다. 처음의 근거는 이웃이라는 데 있었다. 내가 브리즈번에 도착하고, 아니 언니를 알고 나서 한 달 정도 지나자 언니는 내게 코리언 마켓이나 잉글리시 프리토킹해주는 호주 로컬 교회에 나를 에스코트해주기도 했다.
거리상으로 이웃이라고 해서 마음도 이웃일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런 언니를 가까이에서 진심으로 따랐고 언니도 나에게 곁을 주고 믿었던 거 같다. 가끔씩은 차로 5분 거리인 언니네 동네에 가서 같이 산책을 했다. 때로 특별한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커피를 같이 마셨다. 언니는 엄격하신 시어른이 계셔서 삶이 조금 고단했고, 나는 글쓰기와 세 아이들의 학교 픽업 같은 살림에 치여서 그리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서로의 시간을 배려하며 드물게 만났다.
그래도 언니를 통해 내 친구가 늘어나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언니가 효부라든가 착한 여자라고 귀띔했다. 그 말을 듣기 이전부터 나는, 우리보다 브리즈번에 15년 먼저 정착한 언니가 우리 이웃이라는 사실이 이미 흡족했다. 오천 송이 장미꽃보다 단지 한 송이에 길들여진 소중함을, 나는 언니를 통해 무심한 듯 몸으로 알아갔다.
과거는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베르그송의 말이 아니어도, 언니의 지난 시간이 현재와 한 덩이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언니는 신중하고 정직하며 따스해서 사람들에게 호감도와 신용도가 높았다.
참척의 시간 속에 드는 건, 어떤 위로조차 힘을 잃는 것이었다.
누군가 섭섭한 말을 하면 내 자아는 토라지기 일쑤였다. 언니를 통해 맺어진 인연도 예외는 아니었다. 때로 내 자아가 꽃잎처럼 떨어지거나 간혹 깻잎처럼 갉아 먹힘을 당하여, 몇몇 지인과는 소원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비통에 빠진 나에게 화를 내거나, 당시 내 처지를 초라하게 만들거나, 따지듯 하던 그들의 본심의 무게를 내 비통한 자아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지진이 나 빌딩이 와해되는 심적 무너짐을 겪으면서,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쓰러진 빌딩에 부서진 벽돌이 어수선하여 적응이 안 되듯이, 가시 돋은 말을 쓰는 내가 어느 지인에게는 그런 불편한 존재였을 것이다. 굴절된 모양새로 내게 불편의 진실을 표출했고 나는 그들의 불편을 해소시켜 줄 도구가 되지는 못했다. 서로 소외된 채로 지내던 기간이 점점 길어져 갔다.
내 속에서 6.5도 이상의 지진이 일어났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지나치는 일은, 진실을 은폐하는 거였다. 참 나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떠나보낼 것은 보내기로 나는 마음을 먹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속에서 '조그만 변화'가 일어났을 때 통하는 언어이다.
그래 나는 그 쓰러진 시간을 생의 스펙처럼 겪었다. 즉 떠나는 일이나 떠나보내는 일에 과감해졌다. 그렇다고 누군가를 떠나보냄을 후회하거나 그 당시 나의 토라지던 자아를 순하게 되돌리고 싶지는 않다. 즉, 내 편을 들기로 했다. 이때 내 편을 들지 않으면 어쩌면 나의 자아는 공중분해가 될 것 같았다. 그것은 여태 해보지 못했던 내 자아의 변화이기도 하다.
이때까지 살면서 나는 내 편을 스스로 들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건,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으니, 타인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했던 속살을 스스로 깊이 들여다 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게 진실이다. 진실은 아름답다고, 그것이 전부라고 제임스 러브 룩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가장 아름다운 건 진실임을 내가 인정하기 때문에, 나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고통을 당해 약자가 된 자 앞에서 침묵하자.
그러나 너무 오래된 침묵은 금이 아니다.
아주 가끔은 그 약자를 노크해주자.
너무 오랜 침묵은, 오랜 벗을 버리는 일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통에 빠지면서, 나는 곧바로 언니네 동네인 브리즈번에서 800킬로가 족히 되는 시드니로 이사를 했다. 딸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리가 먼 것은 이유가 되지 않았다. 뼈가 저리는 아픔을 참기 무척 어려울 때 나는 언니가 옆에 있는 듯이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때마다 언니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저 침묵하며 잠자코 내 젖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언니의 여고동창인 의사를 만나보라고 했다.
언니의 동창이라는 그 여의사는 내가 필요할 때 반 알씩 복용하라면서 수면제만 주었다. 자주 밥을 사주고 그때마다 매번 기도를 해주었다. 의사의 시간이 많지 않았으나 내게 시간을 할애했다. 첨 본 사람이었는데 오래된 사람처럼 친근했다. 같은 시간의 등짝에서 한 덩이로 된 시간을 꽤 보냈다.
그녀는 내가 만나면 좋을 사람에게 나를 데려가기도 했다. 그건 깜깜한 동굴 같은 나의 시간에다 희붐한 새벽의 빛을 드래그하여 끌어다 붙이는 일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말처럼, 특별한 의사였다. 약으로만 치료하는 의사가 아니라 마음으로도 치유하는 의사였다. 그렇다고 정신과 의사는 아니다.
언니의 시어머님은 내 비애를 기도로 달래주셨고, 일면식도 없던 언니의 시누이가 가끔 다가와 내 언 맘을 녹여주었다.
이렇게 누군가의 한 생애엔
떠나는 이가 있으며
다시 만나게 되는 이들이 있다.
그러구러 언니와 나는 거리에 상관없이 동일한 과거를 또 한 번 진하게 공유했다. 그 후 나는 또 한 번의 이사를 하게 된다. 둘째의 직장을 따라 번다버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언니는 내가 이사박사라고 하며 웃었다. 그리고 2년 후 즈음에 우리 집에 오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언 구순이 지나신 언니 시어른 내외분이 한국에 머무시는 동안에, 언니는 우리 집에 와서 이틀 밤을 같이 보냈다.
밤을 지새우며 침대에 누워 도란도란 밀린 이야기를 했다.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하고 해변을 걸었다. 이틀간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번다버그의 자그마한 공항에서 한 시간 동안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브리즈번으로 날아갔다.
언닌, 조금 엄격하신 시어른을 모시고 서른 다섯 해를 살림에 골몰하면서도 표정이 해맑다.
그건 기도의 힘도 컸겠지만 언니 스스로도 작정을 했을 거다.
언니의 삶을 꽃이 피듯 활짝 피워 내리라 다짐하고 마음을 예쁘게 먹었음을, 나는 안다.
언니가 언니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신의 삶을 귀하게 여기며 가꾸어 온지도, 나는 안다.
언니와 함께 바라보던 우리 집 담장에 핀 꽃들이 그것을 말해주는 듯, 분홍과 하얀색으로 지금도 수줍게 피어나고 있다. 흰 꽃 분홍 꽃이 다 언니를 닮았다.
ㅅ언니가 떠나고 나는 다시 떨어진 꽃잎을 쓸어 담아 나무 밑에 부었고, 깻잎에 벌레를 잡아주고 물을 주었다. 이렇게 시간의 등짝에서 시간을 타고 어디론가 미래의 시간을 향해 가는 일은, 참 신비롭다.
오늘처럼
흐린 날의 꽃이,
더 환하다.
*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