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진 꽃, 다시 붙일 순 없는 일이다.
갉아 먹힌 깻잎 아까워, 벌레의 속살 헤집는 일 또한 불가능하다.
지금 있는 꽃과 잎, 무탈히 살피는 게 일머리의 우선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면 생은 참 단순하다.
그러나 사랑 평화 이런 긍정 속으로, 미움 갈등 그런 부정적인 것들이 허공을 유영하다 불현듯, 누군가의 생으로 쑥 들어올 때가 있다. 혼미해진다. 고요하던 시간이 흔들린다. 난처하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이라도, 급작스런 시간의 외람된 등짝 앞에선 황당하다. 그리고 황망하다.
그렇다고 버스에서 내리듯 시간의 등짝에서 맘대로 뛰어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시간이 아무리 쓴 약을 먹이더라도, 시간의 등짝에서 시간을 타고 있는 게 상수다. 아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게 부여된 시간의 등짝에 탄 채로 있어야 한다.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 즉 삶이다. 시간은 삶이라는 모든 존재를 제 등짝에다 올려놓고 시간의 목적지로 존재들을 업고간다.
기어이 시간은, 우리를 태우고 어느 미래로 간다.
‘시간이 약’이라는 은유는 적확하다.
제 아무리 혼미하고 흔들리며 난공불락 같던 시간이라도, 그저 뙤약볕에 콩밭 매는 아낙네처럼 시간의 등짝에 타서 시간을 하나하나 지우며 가다보면 시간은 제풀에 기가 꺾인다. 삶의 지난한 풍력에 나부끼고 흔들리던 시간들이, 유연하게 품어안는 강물처럼 시나브로 유순해진다.
생에 부여된 시간을 내릴 수가 없으니 건너뛸 수도 없다.
깨어져버린 시간을 붙이고 무너진 시간을 다시 쌓아 올리는 일은, 시간의 등짝에서야 가능하다. 우리를 태운 시간이 말처럼 시간의 길 위를 달리거나 강물처럼 흐르지 않으면, 더 이상 진척되거나 진전되는 일이 없다. 잘 아시겠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건 더욱 더 불가능하다. 지금도 우리가 탄 시간이 뚜벅거리며 미래라는 현재를 향해 가고 있다. 시간을 탄 행복과 불행이 각자의 시간 속에 뒤섞여있다. 우리는 죽음과 생, 불행과 행, 실패와 성공, 가난과 부... 사이에 낀 시간의 등짝에 올라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행과 불행은 추상적이어서 누군가의 내면에 있을 땐 색깔이 아슴프레하다. 어느 게 행이며 어느 것이 불행인지, 우리 속내에선 안개처럼 희미한 색으로 잠복하고 있다. 분간키 어렵다. 행 불행이 활동하기 전까지는 까만 콩 하얀 콩 가리듯, 똑부러지게 가려낼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시간은 끝까지 가혹하지는 않다. 그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시간을 숙명처럼 삶 속으로 받아들여 시간의 등짝에 타고 있으면 시간의 열차는 간다.
시간의 열차는 엄중하다.
누군가의 시간에서 가장 큰 사건이, 자식 먼저 천국 보낸 ‘참척’이라 하자.
그 후 3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고 하자. 그 아니면 그녀는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깊은 폐허의 맛을 보았을 게다. 아니 그 몸이 폐허다. 폐허, 그게 그니에게 부여된 시간이라면, 그래도 움직여서 살아내는 게 그니가 건너야 할 시간의 조건이었다.
시간이 살아 움직이니까 산 사람 또한 시간과 동일한 덩어리로써, 시간을 타고 숨을 쉬고 움직여야 한다. 시간이 비탄하고 고통스럽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시간이다. 험준한 고산을 등반하듯 시간은 때로, 우리에게 시지프스의 바윗덩어리를 안겨놓고 꽁지를 빼는 것 같기도 한다. 그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시간은, 우리와 동일한 덩어리로 흐른다.
홀연히 자식 떠나보내는 일이 ‘은행잎 하나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나의 내면은 지진을 겪었고, 그는 무無라는 법문을 빌어 내게 그렇게 전하였다.
나는 그 말이 황당하지 않았다. 그 한마디 말씀으로, 한동안 비탄의 시간을 지탱하는 의자로 삼았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한오라기에 목숨을 걸듯이, 내겐 노란 낙엽 한 닢에 내 생을 맡겼던 시간이 있다.
* 2화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