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대학 2학년을 한 학기 마치고 필리핀으로 영어연수를 가려했을 때, 난 서슴없이 가라고 했다. 내적 동기유발은 학습능률을 배가한다는 걸 믿었으니까. 6개월 연수로 아이를 보낸 날부터 나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 그건 나 자신도 예견치 못했다. 아이와 처음 겪었던 분리불안은 내 안에다 허전한 동공을 팠다. 그만큼 내가 큰아이를 믿고 의지했던 걸까. 아이가 떠난 날부터 어미로서의 가슴이 설명할 수 없이 미어져 내려앉았다. 태를 떼어 놓은 듯, 내 오장육부가 든 속내가 아프고 저렸다.
그 당시만 해도 대학을 가면 한 두 해의 어학연수가 필수처럼 행해지던 때였다. 잠시이지만, 아이 셋과 따로따로 세 번을 이별하게 되면 이 어미의 쓰라린 가슴은 저리다 못해 남아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겁이 났다.
분당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둘째와 셋째의 과외비용을 따져보았다. 호주로 유학을 가더라도 그때의 낮은 환율(714원)이면 학비 외에 다른 비용을 최소로 할 때 가능할 것 같았다. 아이 둘을 앉혀놓고 이를 함께 고민했고 큰딸을 불러들여, 우리 네 식구는 같은 날 같은 호주행 비행기에 몸을 얹게 된다.
아참, 1. 12일이 결혼기념일이니 그날만은 몇 년 전에 천국 가신 아이들 아빠가 우리 곁으로 올 것 같았다. 그래 1. 8일 날이 큰아이가 호주에서 첫 수업이었으나, 며칠을 더 늦춘 2007년 1월 12일에 출국했다. 그렇게 다섯 식구가 다 같이 태평양을 건너게 되어 가장인 내 마음이 한결 놓였다.
아이들이 대학공부를 마치면 어디로든 제 길이 열릴 거니까, 나는 한국으로 되돌아오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살아가는 일은 어디 마음먹은 대로 호락호락한가.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더라도, 엄마라는 자리는 끝나지 않음을. 세월이 강물처럼 흐르고 강물이 모래알을 매만지듯 어미가 자식 보듬는 손길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호주 영주권을 따는 일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요구한다.
큰딸은 호주에서 회계학과를 졸업했다. 그 당시 회계학과가 이 나라의 부족 직업군에 속해 있었다. 아이엘츠 점수 각 밴드 6.5를 충족하면 가능했다. 그러나 그만한 점수를 얻기란 쉽지 않다. 늘 아슬아슬 아깝고 안타깝게 점수가 모자란다. 한 번 응시 때마다 330불의 비용을 내고 여섯 번의 재시도 끝에 딸은 점수가 나왔다. 픽업을 갈 때마다 나는 시험을 치르고 나오는 아이에게 물어봤다.
이번엔 몇 명이나 쳤어? 한 300명 되던데. 우아, 요즘 환율이 천 원대니까 1억이네. 퀸즐랜드주만 해도 4개 대학에 나눠서 치니 그 돈이 다 얼마여. 그러게 말이야.
우린 그런 대화를 나누며 깔깔 웃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대부분의 회계학과를 나온 학생들이 그만큼의 공부를 해야 하고, 아슬아슬하게 실패한 후의 가슴앓이를 겪으며 꽤나 긴 인내의 시간을 맘 졸이며 기다린다.
둘째 딸은 약대를 졸업했다. 그런데 2014년도부터 약학과가 부족 직업군에서 빠질 것을 우리는 예상치 못했다. 시드니에서 인턴을 마친 아이는 도심으로부터 떨어진 소도시에 2년 근무를 채워야 하는 조건부 영주권을 땄다. 다행히도 아이가 이곳 번다버그를 도심보다 선호하니 감사하다.
아이들 두 명이 영주권을 취득했으니,나는 기여제 부모 초청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자녀 중 2분의 1이 영주권을 받게 되면 이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게다. 기여제 초청비자는 신청 후 1년 반 만에 승인이 되었는데, 근래에는 3년이 지나도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승인 직전에 10년간 호주불 $10,000을 은행에 예취해야 하고, $43,600은 전액 지불해야 한다. 전자는 10년 후 돌려받고, 후자는 기부금으로 지불된다.
우리의 입장으로는 비싼 비용이나, 호주 당국으로선 연로한 부모가 이 나라의 이민자가 되어봤자 경제적 능력이 없고 병원비용 같은, 공적인 복지비용이 더 지출된다며 득 보다 실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는 결혼한 자녀가 아들딸을 낳으면 부모가 아기를 돌봐주기 때문에, 간접 경제를 창출한다는 현실적 의미에는 이들도 동의한다.
나는 호주에 머물 비자를 충족시키기 위해 처음엔 가디언 비자로 왔다. 그러다 학생비자를 받았다. 요즘은 관광비자를 연장하거나 호주와 한국을 번갈아 오가며 살고 있다. 지난해엔 한국을 1년에 한 분기 이상씩 줄곧 머물기도 했다. 요즘 들어 고국에 올 때마다 느끼는 건, 한국과 호주의 중간지점에 어정쩡한 자리에 내가 서 있다는, 가슴 싸한 소외감의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는 거다. 이방인의 심정이 절실히 와 닿는다고나 할까.
그리고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인의 정서가 이전보다 냉랭하게 느껴진다는 것과 주변 환경의 공기가 더 혼탁해져 있다는 것이다. 친정 온 딸의 마음처럼, 나의 조국이 조금은 염려되는 심정이 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올해는 큰아이의 예식으로 인해 두 번을 서울에 나왔는데, 올 때마다 한국 쇼핑문화의 시스템이 진화되어 있어서 나는 촌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낯선 문화의 격절 감이리라.
여하튼 아이들을 이역만리 이국에 두고 선뜻 떠날 수 없는 어미는, 어쩔 수 없이 호주 영주권을 신청해놓고 승인될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 고국에 살아도그렇겠지만, 이국의 삶 또한 만만치 않음을 여전히 체감 중이다. 좀 더 명백히 말하면, 이곳 번다버그 사람들과 어설픈 영어로 대화하고 이들의 색다른 지방색 짙은 문화를 체험하고, 이방인의 이질적인 감성을 이국인과 혼효하며 혼융해본다는 건 가슴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그만큼의 서늘한 외로움과 깊은 고독감을 껴안고 길을 나서는 고행의 여행이라는 거다.
안되면 즐기라 했던가.
PS :
'호주영주권'을 검색하여 들어오셔서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이 꽤 많으십니다. 참고로 저는 올 1월, 이민성에 신청서 넣고 나서 3년 1개월 만에 "143 기여제 부모 초청 영주권"을 받았습니다.
기다릴 때는 앞이 깜깜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고... 나름 힘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인내하고 노력하며 시간을 잠잠히 기다리니 열린다, 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분들의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어 좋은 결과 있으시길 빌어봅니다. 감사합니다. ^^ 2018. 10. 11. 예나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