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예나네

그가 떠난 후 난 그리 울지 않았다.

‘불행을 기척 내지 마라’ 던 어른의 말씀을 마음에 앉혔다.

울어야 할 때 웃었고, 울고 싶을 때도 웃었다. 내 옆지기의 부재를 알고 타인이 훌쩍댈 때도 나는 웃었다. 몸 어딘가에 흔적 없는 무덤처럼 울음을 묻어두었다. 두 살배기 막내가 아빠, 아빠 하며 아빠의 사진 앞에서 온 힘을 다해 제 아빠를 불러댈 때도 웃었고, 다섯 살짜리 둘째가 넘어져 오른쪽 볼에 피가 배어나오며 엄마, 울 아빠 왜 안 와? 할 때도 웃었으며, 여덟 살 된 큰아이가 문고리를 만지작대며, 아빠도 없는데 누가 피아노를 사주지, 하며 불안감을 내비칠 때도 나는 웃었다.

피아노를 공수해오는 일이 우는 것보다 더 급했다.

아이들 큰엄마가 롯데백화점에서 신청한 삼익피아노가 배달되던 날, 우리 네 식구는 피아노 앞에서 하얀 배꽃같이 웃었다. 그가 떠난 지 며칠 되지 않았으나 그렇게 웃기 시작했다. 그가 없는 배밭을 나 혼자 경작할 땐 농법을 몰라서, 내 마음속 그를 불러 궁금증을 질문하던 여덟 해 동안도 나는 웃었다.



가끔 평택과원의 나뭇가지 사이로 감미로운 바람과 청아한 새들의 애가哀歌를 웃음으로 맞던, 내 안에 각인된 파편적 시간들을 불러와 쓰다듬는다. 그럴 때마다 내 의식의 바닥에 가라앉아있던 ‘밀로 Milo의 비너스’ 상도 함께 상기想起된다. 기원전 200년경에 제작되었고, 멜로스 Melos 섬에서 발견되어 밀로의 비너스라고 이름이 지어졌다는 여인의 상, 그녀에게 팔이 있었다면 그렇게 유명해지지 않았을 거라고 수전 손택은 말한다.

손택이 ‘폐허의 아름다움’으로 찬사를 하기 이전부터 나는 여인을 품고 있었다. 팔이 없는 장애를 초극하여 귀품 있게 옆모습으로 초연히 서있는 여인, 그 영혼의 맵시를 흠모하고 있었다. 잘린 팔 끝에선 쓰리고 아픈 만큼 더 뜨겁게 끓어오를 열정이, 남겨진 몸통에서는 텅 빈 지체의 시린 추모追慕, 그래서 더욱 강인한 여자의 생명이 느껴졌다.

몸통이 떠난 우리 가족의 좁은 에움길에서, 나는 그녀의 정신력을 닮기 원했다. 잘려나간 팔 끝에서 전해지던 근원적 생의 본성을 이식받기로 했다. 저 팔 끝의 담력으로, 내가 우리 집 몸통의 몫이 기꺼이 되길 빌었다. 저 석상만큼이나 단단하게,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가 나로 인해 지속되기를.

폐허 끝에서 뿜어지던 강한 실존, 그것을 웃음이 밀고 나아가고 있었다. 그래 몸통의 텅 빈자리에서 우린 웃음을 달고 살았다. 공허로 위협당할 집안에 감도는 웃음은 그의 온기이기도 했다.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 아이들과 나의 웃음은 시간을 이끄는 수레처럼, 시간을 한결 가볍게 밀고 나갔다. 아이들 셋이 자라 도회지로 나올 때도, 해외로 유학을 올 때도 더불어 웃었다. 과원에서 살던 아기적만큼 티 없는 웃음은 아니었을지라도, 선물처럼 웃음꽃을 피우며 살았다.



두 살 배기이던 막내, 그 아이는 지 어미 곁에서 스물두 해를 넘기고, 어느 날 잠결에 홀연히 제 아빠 곁으로 갔다. 막내가 떠난 날부터 그제야 나는 흥건히 울었다. 애통과, 죄책감과, 수치심과, 신을 향한 회한을 눈물로 씻고 씻었다. 눈물은 풍성한 예금 잔고처럼, 내 마음을 슬쩍 터치만 하면 누선淚腺을 따라 하염없이 인출되기 시작했다. 스물몇 해 동안 울지 않고 심연의 호리병에 담아 둔 눈물 통장에 이자가 붙은 것 같았다.

내가 원할 때도 원치 않을 때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개울물처럼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거울 앞에서, 식탁에서, 화장실에서, 슈퍼마켓에서, 길에서…, 내 안에서 나오는 눈물은 흥부네 박속에서 나오던 보물처럼 풍성했다.

눈물을 쏟고 나면 가슴이 가지런히 가라앉혀지고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도 이제는 두 딸이 지켜보는데서 때마다 그 눈물을 헤프게 쓸 수는 없다. 아이도, 아이 아버지도, 천상에서 보고 있지 않은가. 죽도록 자식을 지키는 게 모성 아닌가.

그가 떠난 후 내 마음속에 ‘밀로의 비너스’를 심었다면, 아들이 떠난 가슴에는 이탈리아의 화가 귀도 레니의 ‘가시면류관을 쓴 그리스도’를 담았다. 십자가에 못 박힐 이전의 예수, 그땐 그도 인간이었으니까, 그의 표정엔 죽음으로 향하는 고통의 빛도 서려있었지만, 부활復活이라는 엄청난 기적을 이룰 평화와 생명의 빛이 더 역력하다. 나는 곡진하게 울고 싶을 때, 그 평화의 예수를 바라본다. 그 예수 안으로 나를, 예수를 내 안으로 고요히 앉힌다.

그럼에도 나는 깨어지고 break, 우화羽化처럼 깨어나길 wake-up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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