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만지다

by 예나네

상처의 부위가 뜨거운 건, 곪기의 전초이다.

너무 뜨거우면 자기 자신도 자신의 뜨거운 부위를 선뜻 건드리지 못한다. 아리니까. 몸뿐 아니라 마음의 상처도 그러하다. 나는 마음의 뜨거운 자리를 짐짓 피해 딴짓에 마음을 쏟는다. 청소를 하거나, 음악을 틀거나, 프랑스 자수를 놓거나, 양초를 만들거나. 다른 책은 한 구절도 못 읽으면서, 나의 속내를 냉각시켜주는 것들은 기어이 찾아서 본다. ‘서편제’, 박경리, 사마천 같은.


이상도 하지. 나의 속내보다 더 뜨거운 것을 들이면 뜨거운 것에 더 뜨거운 것이 더하였음에도, 끓던 속이 냉각되다니. 타인의 뜨거움은 자신의 뜨거운 부위로 옮아오면서 오히려 냉철해진다. 그래 힐링이 된다.

상처 난 속이 몹시도 뜨거울 땐 혼자 멍 때리는 시간을 피해야 한다. 그 시간은 시간을 점점 더 뜨겁게 달구니까. 통점의 극치. 뜨거운 것은 멍 때리는 그 미세한 세포를 기다렸다는 듯이, 장전된 총알처럼 불길 같은 피돌기를 온몸으로 쏘아대기 시작한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듯 속이 미사일같이 확 끓어오를 수도 있으니, 그전에 멍 때리는 속내에다 훅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 어떻게? 예컨대 내 대신 소리를 내질러대 줄 대상을 내 안으로 초대한다.



“으으으으 아이고아이고….”

“이 대목은 통성을 쓰지 말고 머리하고 코를 울려서 가성을 쓰라고 그랭게. “

영화 ‘서편제’의 소리꾼 유봉 아비는 여식인 송화에게 소리를 이리 가르쳤다.

어느 날 유봉은 송화를 데리고 귀곡성을 지르기 위해 음산한 집을 애써 찾아들어간다. 북채를 두들기며 소리꾼 송화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송화는 장님이 된다.

“송화야, 내가 니 눈을 그렇게 만들었다 알고 있었제. (…) 그럼 용서도 했냐. 니가 나를 원수로 알았다면 니 소리에 원한이 맺혔을 텐데. (…) 니 소리 어디에도 그런 게 없더구나. 이제부터는 니 속에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혀라. 동편제는 무겁고 맺음새가 분명하다면은 서편제는 정한이 많다고들 하지. 하지만 한을 넘어서게 되면 동편제도 서편제도 없고 득음의 경지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숨을 거두기 전에 유봉 아비는 송화한테 그리 일렀다.


이상도 하지. 자신이 장님이 된 비운을 알아차린 찰나에 송화의 가슴은 끓어올랐다. 인근 마을의 소리꾼을 찾아가 심청가를 가르쳐달라고 간청하게 되고 목청에서 소릿길이 터지기 시작한다.

객관적인 타인의 불행은 고상해 보이는 걸까.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 지는 걸까. 송화의 고상한 처지만 쏙쏙 빼가며 그리되고 싶어 졌으니. 영화를 보는 동안 내 안에서 질투심이 잠깐 솟았으니. 그뿐인가.


고독을 뼈에 새기려는 듯 원주의 집필실을 꼭 걸어 잠그고 열여덟 해 동안 『토지』를 원고지에 적어나갔던 박경리 선생의 혼. 선생은 사마천의 사면초가의 삶에다 당신의 세계를 기대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진 이릉 장군을 두둔하다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48세 때 생식기를 제거당하는 궁형의 형벌을 받은 사마천. 옥중에서도 저술에 혼신의 힘을 쏟아 130권 52만 6천5백 자의 『사기』를 집대성하였다는.

'송화' '사마천' '박경리'의 모진 삶을 떠올리면 내 앞에 놓인 삶의 고투는 숨도 크게 못 쉴 하강의 차원이다. 질박하고 도저한 그들의 삶을 껴안는 품새는 그 자체가 예술이지 않던가. 그 대가들의 대찬 삶이 부럽게 느껴지니, 아직 철이 덜 들었는가. 그들의 삶의 고투가 얼마나 절박하게 끓어올랐을 터인데. 가슴이 곪아 피고름을 짜내고 생살 찢기를 수없이 반복하였을 텐데. 새까만 밤을 천추의 한으로 지냈을 그들일 터인데. 그들의 생은, 하늘이 내렸을 터인데.

그림 하나 주셔요. 보이지도 않는데…?
마음으로 보죠.


마음부터 득음의 경지에 든 송화의 모습은 내게, 그 존재로써 아름다웠다.

자랑할 건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내 뜨겁던 시절에 내 몸은 물 묻은 창호지같이 축축 쳐졌었다. 한의원에 가서 몸을 보하는 약을 지어먹어야 했고 주기적으로 링거를 맞아야만 했다. 나 자신의 뜨거움을 내 손으로 만지지도 못하면서 타인에게 나의 뜨거운 곳을 고쳐달라고 강요하던 때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너무 뜨거워 그랬던 것 같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타인은 타인의 뜨거운 것을 정밀히 꼭 짚어주진 못한다. 섣불리 가까운 사람이 섣불리 건드리는 상처는 더 깊은 흠집을 남긴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지인들은 생래적으로 아는 듯도 했다. 맞다. 마음이 몹시도 뜨거울 때는 섣불리 가까운 사람이 요주의 인물이다. 안 그래도 뜨거워 죽을 지경일진대 뜨거운 곳을 꼭 찌르면, 뜨거운 자는 그 뜨거움을 견디지 못한다. 그 사람을 보면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슬슬 꼬리를 내리고 그 사람을 피하게 된다.

섣부른 타인은 또 타인대로, 섣부르게 남의 뜨거운 곳을 섣불리 만졌다가 뜨거운 것에 한번 덴 상처를 후후 불어댄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무연한 강물처럼 흘러간다. 얼마나 다행인가. 회한도 상처도 흐르는 시간에 풍화될 터이니.


몇 해 전 내 안에서 뜨겁게 들끓던 그 부위를 매만지면서, 나는 이렇게 논다. 공허는 쓰라리지만, 이제 살 길이 트이는지 아주 가끔은 불덩이같이 뜨겁기만 하던 부스럼의 딱지 부위가 가려울 때도 있다. 낫고 있으려나. 한 가지 소원, 오직 덧나지만 않으면 된다.

한 가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
득음,
송화는 그 득음에 '온전히' 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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