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그 아가페
선생 자신보다 옥중에서 보내온 아들의 엽서를 읽어야 했던 선생의 부모가 나는 더 저리다. 이십 대의 펄펄한 아들이 감옥에 들 그때 부모의 가슴에서 와르르 무너졌을 돌탑 소리가 들린다.
변소가 있는 냄새나는 감방. 한 방에 빼곡히 든 수인囚人 한 사람씩의 몸뚱어리가 38도 불덩이 같았다는 혹서酷暑. 소위 콩밥을 아들이 먹을 때 부모의 입속에선 모래 같은 밥알이 구르다가, 그 동선에 긁혀 언 손처럼 튼 혀끝으로 배어났을 핏자국. 꽃 지는 봄날에 꽃잎 대신 하르르 쏟아냈을 눈물자국. 성하盛夏의 계절 앞에 속수무책 주저앉아 목판처럼 경직된 가슴 빨래처럼 치대었을 멍 자국.
감옥에 갇힌 아들을 향해 촉수의 하중을 저려 녹도록 바쳤을 부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자리와 당신들의 자리를 바꿀 수 없어 그 한계상황에서 혼절했을 부모. 아들의 감형減刑을 위해서라면 가시 같은 분노도 묵언으로 꾹꾹 삼켰을 부모. 아들 몰래 절망과 희망을 수시로 잉태하고 낙태했을 선생의 부모.
아직 못다 돌아 헉헉대면서도 그 트랙을 꼭꼭 밟아 뛰어야 하는 마라토너처럼, 허공에 물구나무서기보다 더한 시간이 잉태되었다가 낙태되기를 반복했던 수인囚人의 시간. 잉태의 설렘이나 낙태의 절망이 따로 구분되지 않고 그저 세탁기 안 빨래처럼 한 통속으로 돌아가며 견뎠을 20년 20일, 그 감옥의 시간. 허망도 갈증도 ……, 엽서에 꼭꼭 눌러 담다가 언제부터인가는 무덤덤하게 받아들여졌을,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점점 길어지는 갇힌 시간이 깊어지는 동굴 속만큼이나 적막했을 선생의 시간. 그 앞에서 하루하루 성글어 간 부모님의 눈 내린 머리숱.
희생, 그 영화
‘모든 이기적인 관계에 대한 전면적인 포기.’
‘물질세계와 물질세계의 법칙의 굴레를 벗어남.’
영화감독은 ‘희생’을 이렇게 정의하여 영화를 만들었고, 철학자는 프롬의 ‘존재’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이라는 열쇠로 감독이 숨겨놓은 비밀을 비범하게 풀었으나, 범상한 내가 희생, 그것을 내 것으로 이식해 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들이 말하는 희생이라는 정의는 형이상학의 바다처럼 멀고 광범하게 출렁이고 있어, 한마디로 압축하여 짚어내기에 어지러웠다.
‘희생’의 결말에 감독은 주인공을 시한부 인생으로 끝내려다가 시나리오를 바꿔 핵전쟁으로 인해 세계가 멸망하도록 장치한다. ‘개인구원’에서 ‘세계 구원’으로 시점을 확장한 것이다. 이에 한 신비주의자인 우편배달부는 주인공에게 하녀 마리아와 동침하면서 소원을 빌게 되면, 세상의 종말을 피하고 인류를 구원하며 새날 새 땅이 옮을 귀띔 한다. 주인공은 미친 짓이라고 픽 웃다가 자전거를 급히 타고 하녀에게로 향한다. 하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러했듯이, 주인이 전하는 말에 순명한다. 즉, 세계를 구원한다는 동침에 응한다. 신비롭고 거룩한 동침이다.
말이 안 되는 미친 짓 같은 것, 하지만 타자의 구원을 위해서 자아를 순하게 바치는 것, 이것이 ‘희생’이라고 감독은 이 영화에서 말하고 있었다. 죄 없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한 것처럼, 주인공은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인류에게 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고 기도하였고, 이튿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활활 타오르는 오렌지 빛 불길 속으로 든다. 이래서 희생이란 ‘정상적인 인간의 문턱을 넘는 것’이라고 새날 새 땅 문턱 넘는 비밀번호 풀듯이, 그 철학자는 말한다.
희생, 그 잎
‘요나서 강해’를 듣던 날, 희생이라는 색깔은 노란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 내 안에서 오렌지 빛으로 깨어났다.
호주의 어느 수사가 표현한 ‘퀸스랜드 강물에 오렌지 빛 맹그로브 나뭇잎이 점점이 떠내려간다’는 강. 이 강물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중간지점에 있다. 강물에 소금기가 섞여있어 식물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다. 강물에 발 담그고 자라는 맹그로브 나무는 소금기가 제 몸속으로 유입되지 못하도록 뿌리에 겹 막을 쳐놓았다. 그래도 나무의 몸속으로 조금조금 들어 간 소금기는, 나무가 지정한 몇 개의 잎으로 올려 보내진다. 나무의 생존전략이다. 소금기 머금은 잎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렌 짓 빛으로 변한다. 그러다 끝내는 삼천궁녀처럼 강물 위에 툭툭 떨어져 물살을 타고 강물 위로 유유히 떠내려간다, 고 한다.
그래 희생이란, 오렌지 빛 잎 색깔 같은 것이다.
푸른 잎들 틈에서 무당벌레 무늬로 박혀있던 선물 포장지 같은.
오렌지 빛 그 잎들은 진실과 가식, 가난한 자와 부자,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중간지점에서 발 담근 채, 뒤에 남는 타자들의 푸른 날을 꿈꾸며 자신을 선물처럼 내어놓다 스러져 가는 이름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무어파크 가는 길, 강물을 아름답게 떠가던 오렌지 빛 그 희생엽犧牲葉의 물기에서, 물질문명에 회오리바람처럼 휘말려 검게 물들어가는 날들을 잠재우며, 그나마 남아있는 푸른 기운 지키려고 희생하는 성스런 바보들의 존엄한 영상이 비친다.
성스럽고 보람된 책 읽기와 글쓰기를 수행했던 견고한 선생의 그곳에서, 오렌지 빛 맹그로브 나무의 잎 색깔이 전해온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문턱을 넘는 타르코프스키 감독 ‘희생’의 불길이, 오렌지 빛 희생엽犧牲葉으로 활활 타오른다.
* 참고 : 김기석, 「요나서강해 2」, 2015. 6. 청파교회.
김용규, 「희생」,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2004. 3. 이론과실천.
신용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1990. 11. 햇빛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