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그러더군요. 군대 간 자식의 목소리가 힘차면 엄마의 그날이 환하고, 풀 죽어 있을 땐 행주를 꾹꾹 짜서 집안 대청소라도 해야 한다고요. 몸져누워있기조차 아들한테 미안하다고요.
아들뿐일까요. 취업 안 된 자녀, 조기 은퇴한 남편, 병환에 든 가족…. 집마다 고충 하나쯤 지니고 살겠지요. 금 가려는 삶을 잇대어 붙이고 서로 지탱시키며 살아지는 것, 그게 인생이지요. 무너지는 삶의 언저리를 메우며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사람 꽃을 피우며 그리 사는 게지요.
지난 몇 년 동안, 지근거리의 이웃도 힘듦과 아픔이 있었을 텐데 나 혼자만 고프고 슬픈 듯 지나온 것 같습니다. 세상은 푸른데 나만 회색이고 나만 위로받아야만 수채화로 깨어날 것 같았기에, 부축 같은 응원을 받아 회색의 시간을 시나브로 걷어내었습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내 살 궁리에 빠져 이웃에 대해 관심 두지 못한 지난 시간에 미안한 새벽입니다.
누군가의 눈물 닦아주거나 함께 울어줄 일 앞에서, 가끔 그들을 잊거나 회피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바쁜 현실에 매이거나, 때론 분주하다는 이유로 저린 이웃을 끌어안지 못하고 밀어내는 못난 자아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타인의 고충을 돌아보고 토닥여 주는 일이, 자신을 더 풍요롭게 해 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아픈 손으로 더 아픈 손을 만져주는 사람의 얼굴에선, 더 환한 꽃이 피어납니다.
진정한 위로는 우산을 슬쩍 건네주는 것을 넘어 비를 함께 맞아주는 것이랍니다. 비를 맞아주는 일, 선뜻 행하기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생에 단 한 번 누군가에게 그렇게 해주었을 때, 그는 평생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것으로 가슴이 뜨끈해지고 살아갈 힘을 얻으니까요.
누군가 외롭고 힘들어할 때 더불어 밥숟갈 들어주고, 속에 말 들어주고, 그의 말 한마디에 눈높이를 맞추고, 속살에 든 살가운 정 나누며 고충의 시간을 같이 감싸 안아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요. 이처럼 위로는 힘든 누군가를 살리기에, 대단하면서도 소박한 것 같아요.
위로받고 위로하는 풍경은 맑습니다. 위로는 사랑이 진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의 생수를 뿜어낼 때 세상에는 봄꽃 닮은 사람 꽃이 피어납니다. 사람의 훈향이 결곡한 사람의 향기를 세상에 새어 나오게 합니다.
고난도인 내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올 때, 여러 지인으로부터 푸른 기운을 받으며 느낀 게 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비를 같이 맞아주던 그 사람들의 표정은 일관되게 봄꽃처럼 환하고 맑았습니다. 부자가 아닌데도 그들 모두가 부자였습니다. 웃음 부자 - 만면에 웃음기 가득 묻어나는 얼굴이었습니다. 표정이 각기 다른데 다 똑같았습니다. 얼굴에 꽃이 가득 피어있었습니다.
얼굴이 내면의 ‘얼’이라는 것을 그 당시에 절실히 느꼈습니다. 주름 진 얼굴에서도 꽃이 피어나는 사람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드럽고, 그윽하고, 이타적인 내면으로부터 감동을 길어 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잘 익힌 포도주처럼 마음을 잘 익힌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도주를 담글 때, 농부는 포도를 드럼통에 부어서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밟습니다. 포도 알 사이사이에 설탕을 재워 넣고 자근자근 눌러 밀봉을 합니다. 포도가 포도주로 발효되는 시간을 기다리듯이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시간을 지나야 합니다. 한국 사람이나 호주 사람이나, 내면의 질감은 동일합니다. 오래 숙성된 포도주일수록 맛과 향이 좋습니다.
보들레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포도주의 그윽한 기쁨, 누가 너를 몰라 본 사람이 있을까. 뉘우침을 가라앉히고,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괴로움을 잠재우고 (…) 포도의 섬유 속에 숨어있는 신비의 신이여”라고요.
앞으로 내 안에 든 시간의 신이 내면의 어떤 섬유질을 이끌어낼지는 나 자신도 알 순 없습니다. 포도 알처럼 성숙되고 숙성되어 향기로운 포도주의 시간이 도래하길 잠잠히 기다려봅니다.
마음의 부자들이 피우는 사람의 꽃이 지상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그윽이 피어날 그날을 기대하며, 거울 앞에 다가가 나에게 맨 먼저 싱긋, 미소를 보냅니다. 그러자 내 얼굴에서도 꽃무늬가 어리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얼이 그린 봄꽃 무늬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