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아름다운

by 예나네

지나 놓고 되돌아보면 마음이 괴롭던 시간은, 꽃이 피어나던 순간보다 더 아름답다. 가장 사람다운 인간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시간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그리도 곡진하게 울 일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고 보면, 울며 몸부림치던 시간은 속내의 찌꺼기에 호스 물을 뿌려서 씻어내는 시간이었다. 눈물, 그것은 감정을 샤워하는 그런 물이었다.

울다 울다 눈물까지 말라 버린 근래의 어느 밤에, 나는 내 속 어딘가 웅크리고 있던 슬픔의 덩어리까지 분만한다. 슬픔, 손에 잡히지 않으나 감정의 덩어리가 느껴지는 먹먹한 중량감. 그건 손 닿으면 딱딱하게 만져지는 구상체 같지만 빛처럼 손에 잡히지 않을 추상이다.

어느 날 추상적인 그것이 고체 덩어리가 되어 내 속에서 불퉁 뭉툭 쑥퉁 빠져나왔다. 웅크린 짐승 하나가 빠져나가듯 물컹한 게 뭉텅이채 쑥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송아지가 새끼를 낳았을 때 난 미끈하게 빠져나온 걸 본 적이 있는데, 꼭 그렇게 내 속, 그 찰나의 내면은 미끌미끌하면서도 뭉클뭉클 아프기도 했다. 그건 현실과 다름없었다. 꽃이 안겨온 큰아이의 태몽을 꾼 날보다 더 선명했다.


브리즈번의 몬트빌이라는 고요하고 고적하며 고결한 산장에서였다. 절벽처럼 깜깜하던 새벽이었다.
새벽 속으로 빛이 비치듯, 숯처럼 까맣던 내 속으로도 빛이 구체적으로 들어왔다.

내 속이 빛을 뜨겁게 끌어안고 싶어하던 절절한 갈망이 내 몸 그리 표출되게 했을까.

빠개지듯 하던 마음속에서 대추 씨앗 같이 딱딱하던 빛의 결핍을, 내 몸이 미끈하고 뭉글한 그것으로 그리 뽑아내었을까. 내 몸이 살기 위해 스스로 그리 했을까.


그게 어두운 나락으로 내려앉을 내 마음을 끌어올리고 나의 생명을 살리는 제의였을까.

꿈에서 화들짝 나온 후에도 여전히, 내 속은 끓듯이 뜨거웠다. 생생한 해산 같던 그 시간은 뜨끈하고 물컹한 덩어리로써 추억되어 있다.
그건 핏물 같던 슬픔의 덩어리가 끓어오르다 내 몸을 미끌하게 미끄러지듯 빠져나간 뜨거운 실체였다. 아이를 천국으로 보내고 나서 3년 9개월이 조금 못된 시기였다.


아이가 평택 과수원 안에 연못에서 연꽃으로 떠올랐던 그때의 태몽처럼 그렇게 선명하게 남아있다. 슬픈 게 뜨겁게 빠져나갔는데 뜨겁게 남아있다. 못내 소중하고 아름답다.



그게 내 몸을 빠져나가면서 나를 살리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취는 내 심장을 몹시도 저리게 하지만 그만큼, 내겐 아주 아림이다. 오히려 그 저림이 찾아올 때면 내 내면은 그것을 반가이 맞는다. 이제, 아림도 저림도 아픔도 슬픔도 다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 내 것이니까. 거부할 수 없으니까. 더구나 내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새끼를 끌어안듯 내 속에서 운명적으로 솟아나는 절규이니까. 이젠 그런 아림은 다 이겨낼 수 있다.


저린 심정은 단지 하나에만 붙어 있지는 않는다.

때로 내 안의 작은 것이 아주 큰 것으로, 아주 큰 것이 아주아주 쪼그만 것으로 변형될 때가 많다. 내 몸의 생명력이 스스로 그리함을 나는 알겠다. 살기 위해 밥을 먹듯 몸은 살기 위해 스스로에게 적합한 마음의 밥을 먹인다.

느 날 새끼발가락을 거실 한편에 세워둔 운동기구 모서리에 부닥친 날은 하루 종일 내 마음은 새끼발가락에 가 있었다. 너무 아파서.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이거 곪으면 안 되는데, 어쩌지, 하며 나중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작고 큰, 두 개의 저린 일들이 하나로 둘둘 뭉쳐져서 마치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절망을 가져올 때도 있었다.

어느 선배가 한 말이 생각났다.
슬픔에 급수가 없는 것이라고.
자식을 잃었다고 더 슬픈 것도 아니며, 자식이 성적이 떨어졌다고 덜 슬픈 건 아니라고. 그 순간만큼은 다, 죽을 만큼 아프고 슬픈 거라고.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다.


지나고 나면 생은,
다 아름답다.
그저 피자 한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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